분노거래소
『오늘도 휴대폰을 손으로 꽉 움켜쥔다. 그때의 분노를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 이렇게까지 분노를 가슴 깊이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학창시절, 반 아이들 앞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내 자신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치밀어 오르는 부아, 그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거지?』
R1: 언덕길, 그녀, 분노거래소
화창한 날씨다. 이렇게나 기분 좋은 오늘 하루, 나는 내 손과 발에 묶인 쇠사슬을 질질 끈 채 언덕길을 오른다. 덥다. 시원한 얼음이 담긴 음료수 한 잔이 마시고 싶다. 이런 저런 망상을 하며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오늘도 나는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다. 오르면서 생각한다. 도대체 내가 왜 힘든 언덕길을 택하여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평지와 내리막길을 마음껏 달리고, 뛰고, 하다못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데.
그 놈이 생각난다. 내 안의 잠재되어있는 시커먼 욕망일 수도 있고 학창시절 주구장창 나를 괴롭혀왔던 호리호리하고 야비하게 생긴 족제비 같은 그 놈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깨어있는 매 시간마다 상상의 나래를 내 머릿속에서 펼쳐왔었다. 그것이 때로는 성욕으로, 공포로, 살인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그 부정으로 가득 찬 상상의 나래의 주제는 바로 성공한 내 모습, 그것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고생스럽게 올라간 언덕길을 뒤돌아 바라보니 펼쳐진 숲과 건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언덕길을 마저 올라간다. 나름대로 나 자신과의 싸움 중이다. 주변에 눈들이 쌓여있고 바람만 쌩쌩 불어주면 마치 히말라야를 등반 하는 고독한 탐험대원 같은데. 절로 피식거려진다.
올라가던 도중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행여 오늘도 마주칠지 모르는 ‘그녀’와의 스쳐가는 만남을 위하여 무관심한 척 앞만 보고 걸어가는 척 한다. 과연 오늘도 마주칠까? 채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내 옆으로 긴 생머리의 청아한 그녀가 지나간다. 향긋한 냄새, 단정한 옷차림, 무엇보다 시크하면서도 새침한 표정. 이것이 내가 힘든 언덕길을 일부러 택해 올라가는 이유이다.
손목시계의 초침들이 9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다 늦겠다. 나는 조금 속도를 올려 부지런히 언덕길을 올라간다. 곧 있으면 평지가 보일거야. 거기서 뛰어가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지. 헛된 희망을 품으며 날쌘 좀비처럼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이 썩을 몸뚱이야!
도착했다. 평지가 보인다. 어느새 내 입가에는 목적지에 당돌했다는 안도감에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몇 번 내쉰 뒤 소매로 입 주위를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보폭은 넓게, 어깨와 가슴은 활짝 핀다. 내가 도착한 이곳, 바로 이름도 생소한 “분노거래소이다.”
※ 분노거래소 Step 1 : 어떠한 분노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분노를 감정해 드리겠습니다. 감정된 분노는 그 희소가치에 따라 높은 금액으로 매입자에게 팔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른 부가비용은 없습니다. 단, 분노를 판다거나 새로운 분노를 얻기 위해서는 한 장으로 구성된 분노계약서를 작성해 주셔야합니다.
『그때까지도 몰랐었다. 감정을 받은 나의 분노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는 것을』
R2: 계기, 탐험, 분노거래소
녹슨 철문을 힘껏 민다. 지면과 맞닿아서 그런지 기분 나쁜 쇠 긁는 소리가 내 귀를 괴롭힌다. 2층 구조로 된 작은 건물. 간판도 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곳이 바로 분노거래소라…나도 모르게 조소가 나온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당신의 분노, 제가 사드리겠습니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메일 한 통. 그것이 내가 분노거래소를 처음 알게 된 계기였다.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메일에 첨부된 약도와 외관을 찍은 한 장의 사진뿐. 특이한 것은 내가 자주 다니던 언덕길 윗자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난 너의 분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는 단 한 줄의 문구가 나를 자극하여 이곳까지 발걸음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문구를 떠올리니 슬슬 기분이 나빠진다. 마치 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적어놓은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장난을 친 것일까. 이런 저런 잡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분노거래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분노거래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보았으나 대부분 근거 없는 루머들뿐이었다. 허탕을 치면 칠수록 나의 분노거래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관심과 호기심이 한계를 넘어선 나머지 두려움을 무릅쓰고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약간 어두운 현관. 건물 뒤편으로는 크고 작은 산들이 가로막혀있어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감화되었는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 한 채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안내데스크처럼 보이는 큰 타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은 없었다. 탁자를 사이에 놔두고 양 옆으로 펼쳐진 어둡고 긴 복도. 얼룩이 더러 묻어있는 벽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 된 작은 전등들.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더욱 탐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혼재되어 있는 기분을 느낀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건물 내부. 금방이라도 비명소리가 나타날 것만 같다. 뻣뻣한 목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무실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고 가만히 있을 바에는 차라리 돌아다니면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희미하지만 오른쪽 복도 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여기서 키우는 애완동물인가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그 당시 왜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검은 형체는 점점 내 앞으로 스르르 다가온다. 무서운 나머지 “저리가”라고 소리치며 소매에서 휴대폰을 꺼내 물체를 향해 들이댔다. 휴대폰 불빛 사이로 어스름하게 보이는 검은 형체의 모습. 그리고 들려오는 한 괴인의 목소리.
“분노거래소에 오신 것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저는 이 거래소의 중개인이자 건물의 소유주, 미스터 마입니다.”
※ 분노거래소 Step 2 : 분노계약서를 작성하실 때에는 본인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과 인감, 그리고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 비용은 없습니다.
『미스터 마, 마 씨라고 편하게 부르면 되려나. 그런데 자꾸 손으로 뭘 만지작거리지? 가만있어 보자‥ 마치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말이야.』
R3: 첫 만남, 중개인, 분노거래소
굵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맴돈다. 목소리에 놀란 나머지 한동안 멍하니 어두운 복도만을 응시하다 천천히 시선을 검은 형체에게로 돌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흥분되는 이 기분.. 예전 공포영화 “링”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봤을 때 보다 더 온 몸이 떨리는 스릴이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흐르는 정적.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숨을 내쉬며 검은 형체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검은색 중절모에 가려져 얼굴윤곽은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팔과 다리가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은 맞는 것 같다. 흰색과 검은색이 혼재된 스프라이트 슈트, 반들반들한 붉은색 구슬장식이 달린 긴 지팡이 위에 얹어진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왼손. 금방 닦은 듯 윤이 나는 검은색 가죽구두.
사람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인지하자 안심이 들었는지 이제는 그가 오른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어떤 물건’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그러자 나의 관심을 눈치 챘는지 미스터 마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손님께서 어떠한 용무로 이곳을 방문하였는지 이 미스터 마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손님은 특별히 제 개인사무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뜻밖의 대접에 당황하였지만 이내 그를 따라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혼자보단 두 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 결 편해진다. 걸으면서 두려움에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복도주위를 살펴본다. 복도 벽에 걸어진 몇 점의 그림. 얼핏 보면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탄성을 지를 정도로 표현과 기교가 뛰어났다. 다만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섬뜩할 정도로 잔혹하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조금씩 빨라지는 걸음. 사무실에 도착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까. 그러나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복도 끝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과 바로 좌측에 있는 자물쇠로 채워진 낡은 나무문. 오른쪽에는 대각선으로 금이 간 전신 거울이 놓여 있을 뿐.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앞에 큰 문이 하나 보일 겁니다. 그곳이 바로 제 사무실이지요. 이미 문을 열어두었으니 들어가 자리에 앉아 기다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곧 뒤따라 올라오지요.”
미스터 마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한다. 기분 나쁜 노인네. 그의 무언가를 감추는 행동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간다.
※ 분노거래소 Step 3 : 분노를 중개인을 통해 매입자에게 판매하는 경우, 판매 된 금액의 절반은 중개인에게 지급됩니다. 대신 기타 발생되어지는 추가적인 비용은 없습니다. 단, 분노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중개인을 통해 판매하지 않을 시 이에 대한 불이익과 발생되어지는 피해는 모두 판매자 책임입니다.
『위화감이 자꾸 드는 건 왜 일까. 소름끼치는 이 느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착각마저 일어나게 만드는 이 방의 분위기에 난 압도당한 것이다.』
R4: 사무실, 일기, 분노거래소
2층으로 올라가니 짧은 복도가 나있고 그 끝에는 이리저리 긁힌 듯 보이는 두 나무문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탐정이라도 된 듯 발소리를 죽이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넓은 창문을 뒤로 한 채 기다란 사무용 책상이 허들경기의 장애물처럼 놓여있다. 왼쪽에는 책장들이, 오른쪽에는 손님접대용 소파와 둥그런 탁자하나가 배치되어있다. 벽에는 미스터 마의 젊은 모습을 그린 큰 초상화가 걸려 있다. 조금씩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불빛 사이로 먼지 쌓인 장식용 벽난로가 내 모습을 보고는 비웃는다.
기다란 사무용 책상으로 다가간다. 낡은 전화기와 스탠드, 흐트러져있는 서류들(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전원이 꺼진 구식 컴퓨터 옆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있다. 그러나 사진은 없다. 탐정기질이 발동하여 책상서랍까지 열어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초상화 근처로 간다. 젊은 날의 미스터 마. 비록 그림이라 약간은 다르게 묘사했을지 몰라도 내가 처음 받았던 미스터 마의 인상 그대로의 느낌을 받는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갸름한 얼굴. 그의 강렬한 눈빛은 마치 날 보고 있는 듯하다. 옅은 연두색 재킷과 하얀색 셔츠를 입은 상반신. 어깨는 약간 좁아보였으나 전체적으로는 미남형에 가까웠다.
그의 얼굴과 비교해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벽난로 쪽을 향해 걸어간다. 누가 봐도 장식용처럼 보이는 이 조약한 벽난로. 케케묵은 먼지만이 이 벽난로가 언제 이곳에 들여졌는지 짐작가게 해준다. 그리고 먼지가 많이 쌓인 선반위에는 작은 일기장 하나가 놓여있다.
읽고 싶다. 내 마음 속이 심하게 요동친다. 어쩌면 이 분노거래소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 미스터 마가 썼든 누군가가 썼든 이런 상황에서 기록물은 무언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는 것을 추리소설과 스릴러영화를 즐겨보는 나는 잘 알고 있다. 먼지를 털어낸 뒤 일기장 첫 페이지를 펼친다. 방금 쓴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 글씨로 크게 쓰인 문구를 읽어보던 도중 너무 놀란 나머지 일기장을 그대로 카펫 위에 떨어뜨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이것』이 어떻게 이 일기장에 적혀 있는 것일까.
미스터 마가 곧 올 것 같은 불안한 느낌에 재빨리 일기장을 집어 든다. 그리고 빠르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훑어보았지만 아무 내용도 없다. 단, 일기장 첫 페이지만을 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첫 페이지를 다시 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일기장에 여전히 적혀져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 미스터 마가 올라오고 있다. 어서 이 흔적을 지워야한다. 이것은 미스터 마와 분노거래소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일기장을 선반위에 원래 상태로 돌려놓은 뒤 소파로 향해 점프한다. 타이밍 좋게 바로 사무실로 들어서는 미스터 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설명과 상담 후 바로 계약에 들어가지요.”
※ 분노거래소 Step 4 : 분노를 판매하는 절차는 일반적으로 5가지의 과정을 거칩니다. “상담->평가->계약->관리->완료”
『분노를 사고 팔 수 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렇다면 내 분노는 과연 얼마에 팔릴까.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워낙 내 분노는 특별하니까.』
R5: 매뉴얼, 갈등, 분노거래소
소파에 앉아 그가 가져온 자료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분노를 거래하는 방법과 그 목적에 대해 적혀진 작은 매뉴얼 한 권. 복잡하게 설명된 내용과 사무적인 어투는 사이트 회원가입 시 긴 개인정보 관리방침 및 규정을 주의 깊게 읽지 않는 것처럼 보기 싫어진다.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읽으셔야 될 겁니다. 예전 제가 아는 손님 한 분은 규정을 다 읽지 않고 성급하게 거래한 나머지 평생을 고통 속에 몸부림 쳐 살았거든요. 하하하하”
미스터 마가 비아냥거리면서 말한다. 미친놈. 남들이 들으면 심각하고 위험한 이야기를 그는 마치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긴. 여기로 온 나도 똑같은 미친놈이겠지만.
매뉴얼의 마지막 부분인 주의사항을 읽던 도중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뭐, 전부 다 특이하긴 했지만.
- 자신의 분노를 팔고 난 뒤에 다시는 그 분노를 가질 수가 없으며 또한 판매한 분노에 대하여 타인에게 이야기했을 시 발생되는 모든 피해는 판매자 책임입니다. -
분노를 가질 수가 없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리고 왜 주의사항에 있는 규칙들 중 항상 마지막 문구를 ‘발생되어지는 모든 상황이나 피해는 판매자 책임입니다’ 라고 한 걸까.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에게 물어본다.
“저기요. 주의사항의 마지막 문구를 보면 ”모든 상황이나 피해는 판매자 책임입니다“라고 적혀있던데 어떠한 상황이나 피해가 발생된다는 거죠?”
한참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나지막이 말한다.
“그거는 겪어보면 알겠지요. 저도 규칙에 얽매여 있다 보니 이 점을 손님께 알려드릴 수 없다는 점,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궁금하시다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걸 잘 기억하십시오. 무엇이든지, 그 어떤 일이든지 순리대로 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법입니다.”
섬뜩한 내용. 그러나 나는 두려움보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하지만 규정을 어길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용한다면‥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매뉴얼을 다 읽고 미스터 마를 쳐다본다. 계약서를 유심히 보고 있는 미스터 마. 그의 얼굴은 초상화에 그려있던 지난날의 젊었던 그와는 전혀 달라보였다.
“매뉴얼을 다 보셨다면 이제는 계약의 첫 번째 단계로 상담에 들어가지요. 참, 미리 말씀드리는 데 자신의 분노가 얼마만큼 있는 지, 또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지금 단계에서 행해질 상담과 그 다음 단계인 평가에서 파악되어 집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손님께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 될 거라 감히 말씀드리죠. 다만 절대로 계약이 끝날 때까지 제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없을뿐더러 값어치도 떨어지거든요. 이미 분노를 팔러 이곳에 오신 것이니 지금부터는 제 말에 무조건 따라주셔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갈등된다. 막상 분노를 팔겠냐는 말을 직접 들으니 머릿속이 혼잡해진다. 사실 분노거래소에 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지 진짜로 내가 가진 분노를 팔러 온 것은 아니다. 또한 곳곳에서 풍겨오는 건물과 중개인의 인상이 나를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게 만들 정도로 괴이하고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흥분감과 불안감에 대한 기대가 함께 동반되어 나를 지배하는 건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과연 나의 분노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다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심호흡을 크게 한다. 그리고 작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난 대답한다.
“동의합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 난걸까. 아니면 이러한 상황에 압박당한 나머지 긴장을 느낀 내 감정 때문 일까. 아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것이 안도감인가? 난 도대체 무엇을 안도하는 거지
미스터 마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일어서며 말한다.
“아주 좋습니다. 오랜만에 받는 손님인데 시원스럽게 바로 동의해주시니 이 미스터 마, 너무 기쁜 나머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주 좋은 분노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인데요. 흐흐흐. 잠시 쉬지요. 손님에게 제가 아끼는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군요. 상담은 마시면서 천천히 진행하겠습니다.”
잘 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그저 빨리 계약을 마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다. 괜히 잘 못 되면 어떡하지? 일단 가는 데 까지 가보자. 별 거 아닐 거야.
미스터 마가 작게 흥얼거리면서 찻잔이 올려 진 은빛쟁반을 가져온다.
※ 분노거래소 Step 5 : 분노를 평가할 때에는 판매자의 분노의 수량과 그 특성, 그리고 기존에 팔렸던 분노들과 중복되어지는 여부를 판단합니다. 사람의 공통적인 분노의 종류를 제외한 이미 팔렸던 다른 분노들과 중복되는 경우 판매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발견되어진다면 중개인의 재량에 따라 그 자리에서 중복된 분노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달콤한 독이야. 맛보지 않고 지켜만 보았을 때는 그것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이거든. 그런데 그것이 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맛을 보고 난 뒤라는 거지. 뒤늦게 후회하고 상처받는 감정, 그것이 바로 사랑.』
R6: 상담 - 사랑, 분노거래소
향긋한 허브티. 순간이지만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낀다. 건물 안이 아닌,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잔디밭에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난 누워있다. 이 평화로운 정적을 깨는 미스터 마의 한 마디.
“이제 상담을 시작하지요. 손님의 인적사항은 상담과 계약을 통해 제게 알려질 것이니 지금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긴장된다. 내 긴장한 표정을 즐기는 듯이 빤히 쳐다보던 미스터 마가 다시 입을 연다.
“이제부터 제가 3가지 큰 주제와 연관된 질문을 손님께 드릴 겁니다. 아, 그전에 호칭부터 다시 불러드려야겠군요. 손님의 성함 중 이니셜 하나를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차피 신상정보는 계약 시 알게 될 터이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의도일까. 나를 시험하는 건가. 우선은 그의 지시에 따라주자.
“J”
J, 한글로는 ㅈ, 컴퓨터 키보드로는 w, 그리고 Justice, Judge를 대변하는 알파벳‥내 성이기도 하다.
“그럼 J씨, 첫 번째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주제에 따라 질문의 개수 또한 다른데 첫 번째 주제의 질문 같은 경우 총 3개입니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너무 길지도 않은 적절한 횟수이지요. 그럼 첫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의 인생 중 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고리타분한 감정.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몸서리 처지는 감정. 그리고 부끄럽고 또 간절히 원하는 감정. 사랑에 대한 온갖 감정과 정의가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떠올린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말하고 기억하는 그 흔한 “사랑에 대한 정답”을.
“네.”
“누구로 부터입니까?”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사랑을 받았던 한 부모의 자식이었다면 잘 아실 텐데요.”
미스터 마가 크게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하, 재치 있군요. 물론 그것도 훌륭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군요. 더구나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제게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앞에서 말씀 드렸을 텐데요. 다시 기회를 드리지요. 잘 판단하여 제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십시오.”
식은땀이 난다. 이 사람, 그냥 한소리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단순한 정의를 알고 싶은 거였다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상식에 어긋나는 대답을 기억해내자.
속이 울렁거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모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에 속하기에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여자 친구의 사랑 또한 자신의 욕구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가 일방적으로 기대고 원하는 보편적이며 의존적인 사랑이다. 미스터 마가 원하는 대답은 그러한 사랑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니,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주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대속하심과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우리를 뜨겁게 끌어안아 주셨으며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셨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 대답도 아니라고 한다면, 남은 것은 無. 사랑받지 못한 것이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불안한 내 마음을 대변하듯 빠르게 움직인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생각해보았는데 선생님께서 물어보시는 그 사랑은 살면서 아직까지 받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미스터 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굳게 다문 입술을 연다.
“제가 묻고자하는 질문의 참 된 의미를 간파하신 모양이군요. 이렇게 빨리 간파해 대답하시던 분은 J씨가 처음입니다. 제가 원하는 답변은 J씨가 생각하였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맞습니다. 방문한 고객들은 여러 답변들을 내놓았죠. 분명 그들 중에서는 J씨가 처음에 대답했던 것처럼 부모님의 사랑 또는 사랑하는 애인의 사랑,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참으로 다양하게 이야기들을 하였죠. 하지만 그것은 제가 원하는 답변도 아니고, 진정한 사랑도 아닙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바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죠.”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 대답을 내 입으로 내뱉게 될 줄이야. 우울해진다. 부끄러워진다. 마치 내가 패배자가 된 것처럼 위축된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본 적이 있습니까?”
질문 하나 하나가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이번에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 주체라‥답변하기 어렵군. 분명 본인이 정의한 진정한 사랑을 전제로 베풀었냐고 물어보는 걸 텐데…이번에는 무어라고 답변하면 좋을까.
회상해보자. 어린 시절, 나는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는 받는 쪽에 익숙해진 아이였다.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온 환경 덕도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나의 베푸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야간자율학습과 이어진 학원수업을 끝마치고 새벽 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 동네 어귀에 박스와 폐지를 줍던 할머니 한 분이 학업에 지친 내 눈에 보였다. 빨리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도 모르게 옆에서 할머니와 같이 폐지를 주웠었다. 그 할머니는 나의 교복을 보시고는 밤늦게 학생이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며 손사래를 치쳤다. 그러나 나의 도움을 쉽사리 거절하지는 못하셨다. 나중에는 고맙다며 천 원 한 장을 차가운 내 손에 꼭 쥐어주시기 까지 하였다.
이타심,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 배려, 존중,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한 나의 정의와 느낌이 다시 내 머릿속을 소용돌이친다. 오히려 위 질문은 나보다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나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으니까. 순간의 이타심과 동정을 담은 『배려심』은 나를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졌을 뿐이다.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사랑을 이용해왔을 뿐입니다”
미스터 마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한다.
“아주, 아주 훌륭한 대답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한다는 것은 성인군자도 힘든 일이지요. 역시 당신을 오늘 만난 건 제게 행운입니다.”
내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랑 받지도, 그렇다고 사랑을 베풀지도 못하는 나.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왜 사는 것일까.
“생각보다 상담이 빨리 끝날 것 같군요. 그럼 첫 번째 주제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질문. 그러나 이미 던져진 두 가지 질문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사전조사였을 뿐이다. 미스터 마가 진짜 원하는 답변과 질문은 바로 마지막 질문에 있다는 것을.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존재가 사랑을 정의한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나 정의해야만 한다. 그래야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가 있다. 더 이상 내 자신이 비참해지는 게 싫다. 작아지는 게 싫다.
사랑. 사랑. 사랑. 그 딴 감정, 나에게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사람들이 말하고 느끼는 대표적인 감정. 행복함을 느끼고 따스함을 느낀다는 사람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절로 기분이 좋아짐을 느낀다는 사람들. 거짓된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이다.
왜냐고.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거짓말처럼 들리거든. 그래서 자꾸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고 또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겠지.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경험해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는 위험한 행동이지. 사랑을 느끼고 안 느끼고는 자유야. 누가 강요할 수도, 무어라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두서없이 또 다른 내가 머릿속에서 조잘거린다. 그렇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아니 그 상식이라는 것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규정해 놓은 보편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영원한 진리는 아니야. 보편적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특수적으로 변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야. 네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을 받고 주는 건 자기 마음이니까. 특별한 위치, 조건, 장소에서는 모르겠어.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랑은 반드시 받아야한다거나 줄 필요는 없어.
사랑의 정의에 대한 정리가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가 된다. 그러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개운함으로 바뀌어 시원함을 느낀다. 바로 미스터 마에게 대답한다.
“사랑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가변적이죠. 대상이 누구든, 그 베푸는 주체가 누구든 그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죠. 자유의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나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강 학창 시절에 배웠었던 교양 철학과 윤리에 사용되어지던 단어들을 혼합하여 내뱉은 것 같다. 과연 미스터 마가 원하는 답변일지는 모르겠지만 속은 개운해진다.
화난 것처럼 보이는 미스터 마. 약간 짜증스러운 톤으로 꽥꽥거린다.
“좋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답과는 정 반대였지만, 색달랐어요.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알려주지 않겠습니다. 들어봤자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요. 자유의지, 인간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양날의 검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럼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지요.”
질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내 안의 양파껍질이 하나씩 벗겨져가는 것을 깨닫는다. 가면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던 현실속의 내 모습. 하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그것도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분. 내 우뇌의 막혀있던 부분이 뻥 뚫어짐을 느낀다.
※ 분노거래소 Step 6 : 상담은 공통적인 3가지 주제로 진행되어지며 각 주제마다 상담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 또한 내담자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이 분노와 관련된 치부를. 그리고 그와의 상담을 통해서 내 안의 감추어두었던 무언가가 깨어나려고 한다.』
R7: 상담 - 분노, 분노거래소
“두 번째 주제는 바로 분노입니다. 당신이 살면서 느껴왔던 분노들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놓아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와의 문답형식입니다. 문답 하나당 시간은 10초입니다. 첫 번째는 질의, 두 번째는 문답. 세 번째는 무엇일까요. 하하하하. 그럼 시작하지요.”
역시 그는 미친 게 분명하다. 무엇 때문에 미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그의 말에 빨려들어 간다. 정신 바짝 차리자.
“살면서 분노를 강하게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요.”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다. 그런데 제한 시간이 10초다. 미치겠다. 미스터 마가 품 안에서 작은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 시간을 잰다. 그의 얇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숫자들. 빨리 생각해야한다.
“5초, 4초, 3초‥”
“남들이 나를 무시할 때입니다.”
“왜 무시하죠?”
모르겠다. 아니 정확한 이유를 꼬집어 말하기 힘들다. 이기적이라서, 아니면 내가 바보 같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가난해서. 도대체 뭐지?
“빨리 대답해주십시오”
“제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성격이 어떤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하기 쉽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
“이기적이며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냉혈한입니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찼고요.”
미스터마가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한다.
“훌륭합니다. 10초 더 드리지요. 다음 답변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을 죽이고 싶습니까? 아니면 용서하실 겁니까?”
내가 처분을 선택한다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느낀 걸까. 매일 수도 없이 생각해왔던 장면. 생각. 바로 『처분』.
내가 매일 같이 생각해왔던 그들에 대한 처분은 폭력으로 얼룩진 장면들뿐이었다. 웃으며 화해하는 장면은 생각하기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워낙 나에게 가한 행동과 모욕이 오늘날까지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용서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분노와 복수뿐이다.
하지만 고민이 된다. 그들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진짜 죽이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드나 상상하면 이룰 수가 있다. 그들을 난도질하던 토막을 내던 상상에서는 내가 왕이며 신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법이 있고 범법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입히는 행위는 중죄에 해당되기에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다. 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저 상상에서 그 처분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울분을 잠시나마 삭힐 수 있으니 말이다.
“죽이고 싶습니다.”
내 입은 생각과는 다르게 말하였다. “솔직하게 답변해야 한다.”라는 미스터 마의 최면에 걸린 것 이기라도 한 걸까. 당황함을 느낀다. 이어 미스터 마가 말한다.
“그들을 죽였다고 가정합니다. 당신의 분노는 이로서 끝이 난 겁니까. 아니면 계속 남아 있을까요?”
그 부분도 매일 생각해왔던 부분이다. 죽이면 거기서 끝일까. 더 큰 고통과 분노가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만족을 할까.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미스터 마가 크게 소리친다.
“거짓말!”
“제가 분명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은 죽여도 분노가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장담하지요. 당신의 분노는 매우 특별하니까. 오히려 저는 당신에게 제안합니다. 죽이고 살리고를 떠나서 당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게 어떨까요. 뭐 그것이 힘들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이미 예전에 한번 실패했었으니까”
실패 그리고 예전?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곳을 방문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기억나십니까. 중학교 시절. 반 아이들에게 집단따돌림을 당하던 그때의 당신을”
말하지 마. 저 자식,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지.
“말씀이 없는 건 무언의 대답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몇 년 전, 당신은 한 중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수차례 받았었지요. 부유했던 집안 환경도 당신의 허무함으로 가득 찬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고요. 반 아이들을 피해 숨어 다니고 늘 혼자였던 당신.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하하하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의 치부를 다른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도,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것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며 소리친다.
“그런 적 없습니다. 제 분노는 그들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요.”
나의 외침에도 미스터 마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물론 당신의 분노는 매우 특별하고 귀중합니다. 그것은 평가하면 밝혀 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 드리지요. 지금은 상담입니다. 당신이 마주하기 싫은 과거와 대면하여 이겨내야 순수한 결정체로 이루어진 분노가 만들어 집니다. 아시겠습니까.”
헛소리. 너무 화난 나머지 벌떡 일어서며 그의 멱살을 세게 움켜줬다.
“당신, 아까부터 꾹 참고 당신의 그 미친 지시에 따라준 것을 고맙게 여겨야지. 난 분노를 팔러 온 거야. 이딴 차나 마시면서 내 과거에 누가 뭐라 하는 게 싫다고. 알겠어?”
그의 몸이 살짝 붕 뜬다. 그러나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말에 맞받아친다.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방금 제가 말한 J씨 당신의 과거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분노가 어째서 특별한지, 그렇게 된 원인인 깊숙한 분노를 찾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저 당신의 분노에 반 아이들의 괴롭힘도 일부 차지한다는 것을 인지해주기 위한 것이고요. 이해가 되셨다면 이제 손을 내려놓고 다시 상담을 진행해도 될까요.”
난 그의 멱살을 잡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놓았다. 옷깃을 바로잡으며 미스터 마가 말한다.
“그래도 J씨는 양호한 편입니다. 다른 손님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자 눈이 홱 돌아가서는 저를 때리거나 죽인다고 협박까지 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물건을 집어던지며 난장판을 피우던 한 미치광이 아가씨가 생각나는군요. 하하하하.”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자. 그가 내게 있다고 말했던 『깊숙한 분노』. 그게 무엇일까.
“진정이 되셨다면 마지막 문답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시간 제약은 없습니다. 당신의 분노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와 비교하여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만 말씀해주십시오.”
나의 분노가 특별하다는 이유라‥다른 사람들의 분노도 제각기 특수한 사정이나 이유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들도 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분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게 뻔하다.
그러면 무어라 대답할까. 특별한 대답을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대답해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대답이 아닌, 본인이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분노는 특별하다. 아니, 기존의 분노와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근거는? 그거까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막연하게 나만이 내 분노가 특별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의 분노를 설명하게 된다는 상상은 수도 없이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명확한 근거를 댈 수가 없으니 설명하는 것에서 부터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나의 분노가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생각나는 대로 정의하자면 나의 이기심, 욕망, 고집들이 혼재되어 표출되는 분노. 그러나 2%부족하다. 나의 삶에서 축척되어져온, 그 특수하면서도 고유한 무언가가 첨가되어있기 때문에 나의 분노가 매우 특별하다며 몇 십년동안을 착각 속에 살아오지 않았었나.
후회스럽다. 진작 나의 분노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하였다면 지금 위 질문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내 분노의 질이 높아질 것은 자명한데‥지금이라도, 이 시간만이라도 찾아내보자. 나의 분노가 특별한 이유를. 그리고 2%의 그 무언가를!
미스터 마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해 있는 나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본능적 시간감에 따르자면 약 1시간은 족히 넘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부동자세로 고민하고 있는 나. 식은땀이 이마에서 콧등으로 또르르 흘러내린다.
하품소리가 들린다. 미스터 마가 도저히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짜증스러운 톤으로 말한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 그리고 한 가지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드는 울분.
“나의 분노는 매우 특별합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상대방에 대한 원한으로 발생되어지는 것이지요. 즉, 분노도 그 감정이 ”싫어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전제조건입니다. 더구나 분노의 지속시간도 어떠한 상황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예전보다 오늘 날의 분노의 지속시간이 무척 짧고요. 그렇기 때문에 방식만 다를 뿐이지 나중에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한 깊숙한 분노에도, 내가 말하는 특별한 분노에도 속하지 않는『형식적인 분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질없는 감정이죠.
그러나 제 분노는 다릅니다. 분노를 제공하고 표출할 대상이 있다는 점과 지속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은 기존의 형식적인 분노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분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진화를 한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오래 전부터 분노거래소를 운영해왔던 미스터 마였지만 지금 내가 정의내리고 있는 나만의 분노에 대한 특별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이해한다하더라도 분노가 진화를 한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분노를 취급하고 다루어왔을 그에게 있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분노의 진화가 깊숙한 분노에 포함될 지도 모르는 일. 미스터 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콧등의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낸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미스터 마가 크게 웃는다. 실성한 사람처럼.
“무엇이 그리 웃기신 건지요. 저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의했습니다만‥”
용기 내어 그에게 되물어보자.
“J씨, 당신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미스터 마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약간의 연민과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무척 부담스럽다.
“내 이 분노거래소를 운영해온지 20년이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그 20년 동안 당신처럼 분노에 대해 재해석을 한 손님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졌고 누구에 의해 제공되어졌는지 나열하는 것 밖에 없었지요. 간혹 그런 경우는 있었습니다. 계약과정에서 자신 내면에 감추어진 새로운 분노를 발견하게 된다든지, 아니면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고 느껴왔던 분노가 실은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이라든지 말이죠. 그렇지만 극히 드문 경우에다 슬프게도 의뢰인들 모두 불행한 경우를 당했답니다.”
기분 나쁘다. 우선 잠자코 들어보자. 무언가 새로운 단서가 튀어나올 거 같으니.
“가만있어보자. 그런데 아주 최근에 말이죠. 당신이 이곳을 방문하기 전 당신과 아주 비슷한 말을 했던 한 사람이 있긴 있었어요. 자신의 분노도 끊임없이 팽창 중이라며 횡설수설하던 그 사람! 기억납니다. 당신과 차이점이 하나 있긴 하였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자체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참고로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나와 비슷한 분노를 느꼈던 사람이라고? 나만이 유일무이하게 가지고 있던 분노가 아니란 말인가. 똑같다는 건 아니지만 심히 불쾌해지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분노는 오로지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 농축된 분노의 엑기스라고.
미스터 마가 헛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이어 나간다.
“제가 원하는 깊숙한 분노와 큰 연관은 없지만, 새롭게 분노를 바라보았다는 점과 제가 느끼기에도 손님의 분노가 특별한 이유를 알겠으니 마지막 주제로 넘어가지요.”
어안이 벙벙해진다. 좀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에 저절로 한숨이 셔진다. 그런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그 깊숙한 분노는 도대체 무업니까?”
“너무 자세히 아실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어지는데요. 그리고 제가 판단하기에 깊숙한 분노는 전 세계 누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허황된 분노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까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노. 이쯤으로 정리해두죠.”
※ 분노거래소 Step 7 : 상담이 끝나면 중개인은 상담 내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을 지의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상담 내용이 중개인의 재량에 따라 만족스럽지 못하다거나 상담규정에 어긋난다면 바로 폐기처분하며 두 번 다시 거래소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중개인의 다음 단계로의 진행여부 판단은 “계약”단계 전까지 유효합니다.
『나는 욕심(慾心)이 많다. 다른 말로는 탐욕(貪慾)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욕망(慾望)이 넘쳐흐른다고 봐야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좋게 표현하여 갈망(渴望)이나 열망(熱望)이 높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까. 야심(野心), 그것으로 정의되는 나의 욕심.』
R8: 상담 - 욕망, 분노거래소
“이제 상담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군요. 지금까지 잘 따라와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진행하지요. 세 번째 주제는 바로 『욕망』입니다. 질문은 딱 한 가지만 드릴 겁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5장의 색깔카드를 드릴 겁니다. 그 중에서 한 장 뽑아주시되 제게 보여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색깔과 연관된 본인의 가장 강한 욕망을 떠올리십시오. 떠올리셨다면 제게 카드를 주고 바로 상담을 진행하지요. 시간제한은 없으니 부담 없이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하하하“
지쳤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다. 더구나 이것은 일종의 심리테스트이지 않은가. 어렵진 않으니 우선은 저 노인네의 장단에 맞추어주자.
미스터 마가 소매에서 카드뭉치를 꺼낸다. 붉은색 타이모양의 카드들. 전부 뒤집혀져 있어 어떤 색깔들이 있는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주로 왼손으로만 물건을 건네주는 것 같던데 오른손은 왜 잘 안 쓰는 거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어 오른손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다. 분명 세월의 흔적과 상처들이 깊이 베여있는 왼손이랑 별 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관심두지말자.
“5장의 색깔은 랜덤입니다. 중복되는 색깔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5장의 카드에서 한 장 뽑아주십시오.”
카드게임에서 선공을 결정하는 것 마냥 저절로 긴장된다. 떨리는 손으로 가운데 카드를 손으로 집는다.
“좋습니다. 뒤집어서 보시지요. 그리고 떠올리십시오. 강렬하고 끔찍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환상적인 욕망을” 미스터 마가 조금 흥분하며 말한다.
무심결에 뒤집어본다. 검은색. 그것도 진한 검은색.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검은색하면 흔히 떠오르는 욕망이라‥어둠. 탐욕.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흔해. 강하면서도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욕망. 바로 성욕. 해갈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욕망.
“이제 카드를 제게 주십시오. 무언가 떠오른 게 있습니까?” 그가 호기심 띈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예. 그러나 좀 의외라‥”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필연도 있지만 우연도 함께 존재한다고 하지요? 어디보자. 당신이 고른 카드의 색깔이‥잠깐, 검은색?”
갑자기 안색이 변한 이유가 뭘까. 검은색이 뭐 길래 저리 호들갑이냐고.
“왜 그러시는지‥무언가 안 좋은 의미라도 담겨있나요?”
“제가 가진 색깔카드에는 검은색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은요. 예전에는 있었으나 그녀가 가지고 가 버렸죠.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과 비슷하다는 그 사람 말입니다. 참고로 검은색은 쉽게 나올 수 있는 색이 아닙니다. 그리고 검은색을 뽑은 사람은 꼭 끝이 좋지 않다는 불문율이 있지요. 뭐, 믿고 안 믿고는 당신 마음이지만”
웃기는군. 난 또 뭐라고. 그보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야. 만나보고 싶다.
“그렇군요. 이제 제가 떠올린 욕망에 대해 말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말하시지요. 이렇게 귀인을 몰라 뵙게 되어 송구스럽사옵니다.”
미스터마가 비꼬는 말투로 나를 자극한다. 설사 진심이더라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성욕입니다.”
“뭐라고요?”
“제 안의 잠재되어있는 내 욕망을 검은색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더군요.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았습니다. 겹겹이 쌓인 벽들과 장애물들로 인하여 뚫기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꺼풀 한 꺼풀 제 가식을 던져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니 지금 강하게 드는 욕망은 이거 하나였습니다.”
한심하다는 그의 눈빛.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뗀다.
“마치 애들 성교육시간이 된 것 같군요. 저도, 당신도 남자로 태어났으니 기본적으로 성욕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 성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다면 흔히 말하는 『성 범죄자』가 되는 거고요. 어찌 보면 그들은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느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차마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할 성적인 행위들을 그들이 대신 실제로 보여줌으로서 대리만족을 시켜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AV(Adult Video)가 있는 것이고 사창가나 불법퇴폐업소가 있는 것일까요.
욕망은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도 없고요.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점은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성욕이 나왔다는 것은 당신도 잠재적인 성 범죄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더라도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성의 노예가 될 가능성도 다분히 있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나이대가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오히려 요즘 들어서는 어린 나이부터 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잘못된 행위들을 자행한다고 들었다. 성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정립과 혼란. 그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라. 그렇지만 조금은 부끄럽다. 살면서 야한 생각이나 성욕을 가진다는 거 자체를 부정해왔었으니까.
“뭐, 좋습니다. 어찌됐건 당신의 분노가 성욕에도 기인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진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재미있군요.”
“그 여자의 욕망은 무엇이었나요.”
나도 모르게 다급해진다.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한다. 나와 그녀와의 연관성을.
“굳이 알고 싶다면 말해드리지요. 그녀의 가장 큰 욕망은 허무였습니다.”
“허무?”
당황스럽다.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네. 허무요. 무의 공간. 암흑의 세계. 그녀는 살면서 그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감추며 살아왔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은둔형외톨이나 대인기피증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삶은 무척 빛나고 아름다웠습니다.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라 이해하시면 편할까요.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목적이나 성공을 달성할 때 마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게 아닌, 그저 자신이 이룩하고 얻은 지위나 부 등만을 바라보고 좇는 다 이 말이지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버린 그녀에 대한 고정관념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일탈도, 자유로운 의사표현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조건 그녀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하고 남들이 존경하고 우러러 볼 정도의 능력 있는 여자로 비추어져야했거든요.
그러한 세간의 관심이 그녀를 억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쯤, 한 가지 이러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고 싶다. 그 말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자살』을 암시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하기 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여기를 방문하게 되었고 원하는 답을 얻어갔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현재는 실종상태거든요.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이곳을 나설 때 미소를 지었다는 겁니다. 그녀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고 주변인들도 본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어딘가 살아있다면 행복을 빌어주어야겠지요. 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리고 놈을 똑바로 쳐다본다. 아주 또렷하게.
“그럼 슬슬 첫 번째 단계를 끝내볼까요. 일단 『평가』로 넘어가기에 자격요건은 충분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얼굴 맞대며 얘기를 나눠본 게 참으로 오랜만이더군요. 총점을 내리자면 70점입니다. 아직 진실 된 모습은 제게 다 보여주지 않은 게 감점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처음 방문하신 분 치고는 꽤 높은 점수입니다. 그녀의 점수도 곁들여 말하자면‥”
“됐습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할 겁니다. 분노 샘플을 가지러 가야하니 잠시 쉬고 계십시오.” 미스터 마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장이 풀렸는지 소파에 몸을 푹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는다.
※ 분노거래소 Step 8 : 분노에는 일반적인 분노와 특수한 분노 두 개로 나눠집니다. 일반적인 분노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분노로서 강도, 현실가능성, 목적의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되어집니다. 반면 특수한 분노는 어떠한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 두 개 이상의 분노가 섞여있다거나 새로이 만들어진 분노 등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복수하고 싶다. 나를 나락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그 놈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철저하게 짓밟아 버릴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R9: 평가 - 목적, 나의 분노, 분노거래소
“평가를 해보도록 하죠. 파려고 하는 분노가 무엇입니까?”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팔아야 할 지‥”
“제일 먼저 없애버리고 싶다거나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분노면 됩니다. 이미 상담을 통해 당신이 어떠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 지 대강 파악되었습니다. 그래도 모르겠다 싶으면 이 샘플들을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미스터 마가 한 뭉텅이의 서류들을 책상 위에 흩으려 놓는다. 그리고 그가 그 중 하나를 집어 든다.
“규정상 판매자의 신원공개는 할 수 없지만 판 분노에 대해서는 언제든 열람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이 분노를 판 판매자의 기록을 보십시오. 그 사람의 분노의 유형은 일반형. 강도는 중, 현실가능성 30%, 목적은 『복수』였습니다. 급으로 치자면 3등급정도? 하도 안 팔리다 거의 다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팔렸는데‥참.”
강도와 현실가능성이라는 게 분노의 평가 기준인건가. 일반형이 있다면 다른 형태도 있다는 소리인데‥
“이것은 저희 거래소 역사상 가장 높은 금액에 판매된 분노입니다. 유형은 특수형, 강도는 최상, 현실가능성 80%, 목적은 『변화』였습니다. 역시 급으로 치자면 1등급이었죠. 올리자마자 한 중견기업의 CEO가 거액을 주고 사버렸는데 결국 얼마 안 되어 변을 당했답니다.”
“왜죠?”
“주 거래처였던 다른 계열사가 자기의 인수합병제의를 무시하고 도리어 유능한 직원들을 몰래 빼내갔었거든요. 그런데 본디 소심한 성격이라 있는 그대로 상대회사에게 화를 표출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다 여기를 방문하게 된 거죠. 그리고 금액 상관없이 자신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켜줄 분노를 찾다 발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반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자신과 상대 계열사의 비리를 검찰에다 폭로하였거든요. 거기에 근거 없는 비방과 터무니없는 기사들을 날조하는 등 예전의 그로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을 하는 겁니다. 결국 상대 계열사는 폭삭 망해버리고 더불어 자신의 회사까지 송두리째 무너지면서 그의 처절한 복수극은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더군요.”
“다른 무언가가 있었나요?”
“넘지 말아야 할 도를 넘어 선거죠. 술이 한 잔 두 잔 넘어가게 되면서 취기가 올랐는지 자신의 친구에게 본인의 분노를 비롯하여 모든 일의 경위를 말하게 된 거죠. 주의사항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판매한 이후에는 절대로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친구와 헤어진 후 집으로 가던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몇 달 후에 지역 경찰서로 범인이 자수를 하였다는데 알고 보니 상대회사의 CEO이었습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회사를 말아먹게 만든 장본인을 가만히 둘 수 없어 그가 자주 다니던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로 그냥 들이박았더군요. 몇 번이고. 역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봅니다.”
“평가 기준이 뭡니까?”
“눈치 채셨겠지만 기준은 3가지입니다. 『강도, 현실가능성, 목적』. 분노의 유형 또한 크게 『일반형』과 『특수형』의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일반형은 말 그대로 누구나 한 가지이상씩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분노라 보시면 됩니다. 대표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 끓어오르는 슬픔, 참을 수 없는 욕정, 폭력, 강간, 살인 등이 이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특수형 같은 경우 아주 특별한 계기나 원인으로 인하여 생긴 분노를 말합니다. 특징으로는 두 가지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거나 또는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롭고 희귀한 분노면 이에 해당됩니다.
솔직히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처럼, 분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누그러지는 게 이치거든요. 일반형 같은 경우 그 시기가 매우 빠른 사람이 있는 반면에 드물게 오래가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그 둘의 공통점은 어찌됐건 분노가 시간에 비례하여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다만 특수형의 분노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설사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죽었다거나 사라졌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괴롭힐 것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점차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확대시켜 피해를 준다는 점이 매력입니다. 있잖아요. 감정 없는 인간, 사이코패스(Psychopath). 그들도 어떠한 강한 계기나 충격으로 인하여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분노를 사회에다 발산시키죠.
그렇다고 특수형의 분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가 적절하게 표출되어지지 않은 채 자꾸 쌓이게 되면 결국 쌓여진 분노가 특수한 분노로 바뀌게 되는 아이러니한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물론 분노를 적절하게 풀어주고 또 사용해준다면 이는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어주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강하고 적극적으로 변하게 만들어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동안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펼쳐왔던 직장상사에 대한 복수라던가 갖고 싶었던 물건이나 여자에 대한 탐닉, 세간에 대한 관심과 이목이 모두 나에게 쏠린다는 우월감. 누구나 한 번은 꿈꿔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분노를 제대로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아니면 나약하고 병든 자신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원동력을 찾고 있다면? 거래하자. 전자에게는 분노해소를, 후자에게는 변화계기를 제공해주는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자. 그래서 이 분노거래소가 생긴 것이고 오늘 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평가단계는 분노를 거래할 때 아주 중요한 단계입니다. 평가에 따라 자신의 그동안의 삶이 저평가 받느냐 아니면 재평가 받느냐로 갈리어지거든요.”
치가 떨린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납득이 간다. 미스터 마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정하기 싫다.
“그러한 목적으로 이 거래소가 생긴 것이군요.”
“동조해주시니 고맙군요.”
“그건 아닙니다. 단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거래하는 제 마음도 편하니까요.”
“뭐, 방금 한 얘기는 서두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더 들려드리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군요. 참고로 강도는 분노의 표출입니다. 얼마만큼 내·외적으로 분노를 잘 표출하고 있는지, 그 세기와 한은 어느 정도인지 그래서 팔 분노는 결정하셨습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분노거래소에서 취급하는 분노는 일반형입니까? 아니면 특수형 입니까?”
“오호라, 색다른 질문이군요. 당연히 『둘 다』입니다. 다만 특수형이면 좋겠다는 저의 개인적은 바람입니다. 요 근래 일반형만 본 지라 자극제가 필요하던 참이었거든요. 감히 예측하건데, 손님의 분노는 분명 특수형 일거라 확신합니다. 하하하하. 이제 말씀해주시지요.”
재수 없는 노인네.
“저는 사람들만 보면 이유 없는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살인, 욕정, 그 모든 종합적인 분노들이 표출된 채로 말이죠. 왜 인지는 모르겠어요. 단순한 열등감이나 저도 소심한 성격이라 화를 잘 내는 편이 아니라고 여겼었어요. 이러한 터져 나오는 화산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원인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태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고뇌했는데 말이죠.
그저 사람들이 웃고 즐기는 모습이 보기 싫고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를 저는 공감하지도, 느끼지도 못하겠어요. 오로지 제 자신의 목표와 성공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었고 그것이 저만의 분노의 표출방법이자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어요.
고된 삶이었습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자들과 경쟁하여 이겨야만 하였고 이겼다 하더라도 뒤이어 밀려오는 공허함과 불안함은 저를 심리적으로 압박해왔었죠.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 어린 시절의 상처가 트라우마(Trauma)로 남아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것 같아요. 복수해주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쥐새끼마냥 만들어버린 녀석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철저하게 복수해버리고 싶어요. 다시는 그러한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 선에서 끝내버릴 겁니다. 그러나 항상 생각만하다 끝났습니다. 미쳐버릴 것 같아요. 모두 죽여 버리고 싶어요.”
잠자코 듣고 있던 미스터 마가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브라보, 브라보. 내 예측은 확실하다니까. 그런데 특이하군요. 생각만 한다는 것은 현실가능성은 거의 제로, 불분명한 대상과 수많은 분노의 혼합으로 강도는 측정 불가라‥목적은 『복수』, 사람들이 많이 찾고 공감하는 공통적인 중복 소재. 그렇지만 워낙 다른 두 가지 척도가 새롭고 신선하기에 이정도면 상급이상으로 높은 가격대 형성이 예상되는군요.”
“그럼 바로 계약에 들어가는 겁니까?”
“아아, 아직은 아닙니다. 우선 판매하고자 하는 분노의 희망 가격을 말해주시면 제가 이를 참조하여 조언을 해드릴 겁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거래로 넘어갈 지, 안 할지를 결정해주시기만 하면 이번 단계도 마무리됩니다. 가격을 말씀해주세요.”
진짜로 팔 수 있는 건가. 얼마를 제시해야하지? 나의 분노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특별한 원석 중의 원석인데. 최소한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의 보유자산정도는 받아야 보상이 충분히 될까. 헛소리하지말자. 현실적으로 가능한 액수를 생각해야지. 한번 떠보기라도 할까.
“아까 말하였던 가장 높은 금액에 팔린 분노, 정확히 얼마였습니까?”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토씨하나 안 틀리고 말해주지요. 정확히 87억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기에 가능한 액수였죠. 물론 함부로 당신의 분노액수를 평가하기는 아직은 이릅니다만 비슷한 가격대를 받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습니다.”
87억? 유형이 아닌 무형의 존재. 더구나 담보도 없는 단순한 계약서 쪼가리만으로 87억을? 이거 완전 로또잖아. 이게 말이 돼?
“거짓말 아닙니까? 어느 미친놈이 자신의 전 재산을 준단 말입니까?”
미스터 마가 말없이 품 안에서 무엇을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다. 바로 『거래내역서』. 신상정보는 손으로 가리어 거래금액만 볼 수 있었다. 진짜로 8,700,000,000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확인하셨으면 가격을 제시해주십시오.”
어안이 벙벙하다. 정말로 분노라는 실체가 유형으로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초부터 이 분노거래소라는 것도 생기지 않았겠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두 배”
“뭐라고요?”
“87억을 90억으로 치고 그 두 배를 받겠다 이 말입니다.”
“하하하, 180억입니까?”
“네. 그 가격 아니면 팔지 않을 겁니다.”
“소심하시군요. 저는 더 올렸으면 하는 바람인데요?”
무슨 소리지? 더 낮추어도 팔릴 까 말까인데 올리라니?
“저는 진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언해드리는 겁니다. 200억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무슨 근거로? 설마 사채업자인가?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다.
“왜 200억인지 그 근거를 듣고 싶습니다.”
“별 거 없습니다. 당신의 분노는 그 정도는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혹시 고리대금업자 아닙니까?”
“속고만 사셨나보군요. 아닙니다.”
200억‥평생 다 쓸까 말까한 어마어마한 돈. 내 분노의 값어치가 저리 높았나. 생각지 못한 발언에 잠자고 있던 내 안의 탐욕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한다. 더 올리고 싶다. 200억이라면 400억, 1000억도 가능 하지 않겠어? 지급할 능력이 되니까 지들이 지급하겠지. 높게 부를까?
“행여 높게 부르실 거라면 그쯤 해두시길 바랍니다. 200억도 희망가격일 뿐이지 실제거래가격은 이보다 더 낮을 수도 있습니다. 87억에 거래되었던 분노 같은 경우 워낙 입찰경쟁이 치열해 가격이 올라간 것입니다. 처음 경매가격은 5억이었습니다. 또 거래가 성사되었을 시 제시한 금액의 절반은 저에게 주셔야합니다. 규정을 찬찬히 읽어보면 나와 있을 겁니다.”
맞다. 그랬었지. 200억에서 100억이라‥기타 비용은 발생하지 않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야하나. 아쉽다. 너무 아쉬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자, 결정해주십시오. 희망가격 200억, 거래 하시겠습니까?”
※ 분노거래소 Step 9 : 계약 이후에는 정해진 기간 동안 “관리”에 들어갑니다. 관리는 분노를 거래소에 등록하여 판매하는 것 외에도 판매자가 규정대로 잘 지켜주고 있는 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기간을 의미합니다. 분노가 정상적으로 거래가 된다면 중개자는 최종적으로 거래를 완료하였다는 “완료”증서를 판매자에게 의무적으로 전달해야합니다. 판매금액도 이때 함께 지급됩니다.
『떨린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
R10: 계약 - 분노거래소
“거래하겠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과연 이것이 잘 한 일일까.
“계약서입니다.”
낡은 양피지로 되어 있는 한 장의 계약서. 양피지 특유의 퀴퀴한 냄새. 거기에 적혀진 내용은 무척 짧고도 간단하였다.
- 본인은 명시된 규정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전부 확인하였으며 해당 분노를 판매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
“주민등록증 확인 끝났습니다. 밑에 서명하는 칸이 있으니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 손이나 상관없으니 제 앞으로 내밀어 주십시오.”
갑자기 손은 또 왜. 설마‥
“자른다거나 상해를 입히려고 내밀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의식을 위해서요.”
찜찜하다. 의식이라니. 계약을 끝내려면 별 수 없지.
미스터 마에게 오른 손을 내미니 한 손으로는 검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도를 세게 쥐더니 이내 살짝 베어 버린다. 검붉은 핏방울이 계약서 위에 소낙비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당신. 진짜 뭐하자는 거야.”
“당황스러우시겠지요. 하지만 이로서 우리의 계약은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피로 맺어진 계약, 쉽사리 깨지기도 어렵지요. 그만큼 규정을 어겼을 시의 리스크도 상당하다는 것을. 보험이라 생각하십시오. 당신과 날 지켜줄 신뢰와 보호의 증표랄까. 하하하하.”
아픈 건 둘째 치고 기분이 너무 나쁘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저 말투와 태도.
“이제 다 된 겁니까?”
“네, 아 혹시 주민등록증이나 본인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잠시 제게 주십시오. 아, 이건 가요? 다시 보니 사진 보다 실물이 훨씬 나아보입니다. 외모와는 다르게 꽤 어린 편에 속하군요.”
“확인 다 하셨으면 그만 돌려주세요. 가도 되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몇 가지 사항만 더 전달해드리지요. 판매한 분노는 내일 안에 거래소에 등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몇 몇 구매자들에게 개별연락을 취할 거고 그들 중에서 당신의 분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협상을 진행 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죽을 때 까지 결코 오늘 판매한 분노를 가져서도, 이야기해서도 절대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규정을 어겨 발생되는 피해에 대해서는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반드시 지킬 겁니다.”
“협상이 성공적이어서 분노가 판매되면 거래가 완료되었다는 증서를 드릴 겁니다. 그 증서와 함께 판매대금도 지급될 것이고요. 끝입니다.”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해봤자 달라질 건 없다.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럼 판매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조만간 또 뵙죠. 하하하하”
누가 또 볼 줄 알고. 증서하고 돈만 받으면 그걸로 끝이야.
“참, 혼자 나가셔도 상관없겠지만 아직 이 거래소 구조에 대해 잘 모르실테지요. 괜찮다면 저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출입구까지 안내해드리지요.”
그를 따라 말없이 사무실에서 1층으로 내려간다. 어둠에 적응이 돼서 그런지 한 결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1층에 다 내려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금이 간 전신거울을 쳐다봤다. 거기에 비친 건 내 모습이 아닌 긴 생머리의 여자모습. 머리카락이 얼굴을 깊게 가려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으나 고개를 숙인 걸로 봐서는 기분이 좋지 않는 것 같다.
일반인들이라면 이 상황에 소리를 지르거나 놀랐을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춰졌다는 것은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친숙해. 무섭지가 않아. 오래된 연인이나 친구를 만난 것처럼 포근한 이 느낌. 이내 발길을 돌려 그를 따라간다.
그녀가 누군지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는다. 분명 그와 관계가 있을 테지만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내 눈앞에 보이는 녹슨 철문. 다 왔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졌다. 너무 오래도 있었나보군.
“살펴 가십시오. 저는 이만.”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묻고 싶지 않았는데.
“거울 속에서 어떤 한 소녀를 보았습니다. 검은색 긴 생머리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혹시 아십니까?”
미스터 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부담된다. 마치 동네 말썽쟁이가 평소 흠모하던 여 선생님과의 단 둘의 면담 분위기처럼 말이다. 이 자리를 어서 뜨고 싶다. 괜히 말을 꺼냈다. 대충 얼버무리고 집에 가자.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본거 같네요. 연락 주십시오.”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음지에서 양지로 발을 내 딛는다. 조금씩 빨라지는 걸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잊고 싶다. 오늘 일을. 무심한 저 달이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것 같다. 곧 후회할 거라면서.
※ 분노거래소 Step 10 : 분노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소위 “재력가”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거래소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또한 분노는 무형의 자산으로 분류되어 취급되어집니다. 분노를 많이 거래하고 또 습득하면 할수록 짙은 갈색 오오라가 거래자들끼리는 보일 수가 있습니다. 오오라의 영향은 아직 밝혀진 점이 없습니다. 판매 후기는 안 쓰셔도 됩니다.
『…기대 반, 걱정 반이다. 과연 거기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N1: 허무주의자, 분노거래소
사는 게 싫다. 왜 그러냐고. 왜 사는 지에 대해 잘 모르겠으니까. 그렇다면 죽으라고 부추기는 종자들도 분명 있겠지. 그런데 죽는 건 더더욱 싫어. 너희들은 날 몰라. 그러니 함부로 지껄이지들 말라고.
오늘 가는 곳도 인생의 실패자, 쓰레기들이 오갈 데 없어 모이는 곳이란다. 그 곳에 가는 나도 그들과 같은 취급이라 이건데‥어찌 보면 반은 맞는 말이야. 사는 게 무의미해졌다는 거 자체가 이를 반증해주니까. 안 그래?
주변에서는 나를 이렇게 생각하겠지.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 알파 걸(Alpha Girl), 능력 있는 여자. 그럴만한 재력과 경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우러러보고 좋아라하지. 하지만 실상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모르는 척 거절해버리는 이중인격자 버러지들.
그런데 뭔 언덕길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여. 며칠 전에 큰 맘 먹고 장만한 힐 다 망가지겠네. 그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가면 사장에게 큰 소리 쳐야겠어. 진짜 다시 생각해도 내가 왜 거기를 가야하는지 웃음만 나온다.
분노거래소? 분노를 사고 팔 수가 있나? 여느 사이비집단이나 유령회사 같은 곳인 게 분명해. 아니면 인신매매나 오컬트 집단인일 수도 있지. 어차피 상관없잖아. 나는 내 인생 자체를 부정하며 살아왔는데 죽건 납치당하건 하늘의 뜻이지 뭐.
거기를 알게 된 건 우리 오빠 때문이었다. 평생 놀고먹던 백수가 어느 날 우리 가족 앞에 떡 하니 보여준 수 천 만원이 든 통장.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땀 흘려 번 돈이라기보다는 도박이나 다른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 얻은 검은 돈이라고 생각했었다. 반은 맞췄다. 자신의 분노를 팔아 받은 돈이라고.
오빠의 말에 부모님은 충격을 받으셨는지 할 말을 잃으셨고 이내 호되게 야단치셨다. 분노를 팔아 번 돈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제정신이냐고. 마치 보증이나 사채를 빌려 쓴 것처럼 오해받은 오빠는 그렇게 몇 달간을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지내야만 했다. 어느덧 한 밤중의 소동은 서서히 묻혀가는 가 싶더니만 또 다시 터지고야 말았다. 그것도 아주 크게.
평소의 오빠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집에서 놀고먹기는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여느 때처럼 엄마와 오빠가 말다툼을 하던 도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흘리던 오빠였지만 그 날만큼은 달랐다. 화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
놀란 나는 즉시 아빠와 경찰에게 알리었고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어딘가 오빠의 표정하며 몸짓이 이상해보였다. 불안해하고 초조한 모습. 아버지도 신경이 쓰이셨나본지 오빠에게 정신감정을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몇 번의 저항 끝에 반강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오빠는 지금까지 그 곳에서 치료 중에 있다.
오빠에게 갖다 줄 옷가지하며 물품들을 가지러 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름 꼼꼼한 성격 탓에 내 방보다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된 그 방이 어느 새 돼지우리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방 청소를 하던 도중 발견한 한 장의 증서.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그 종이에 적힌 한 단어. 『분노거래소』
저 곳이 오빠가 분노를 판 곳이구나. 그 곳에 가면 무언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며칠 동안 조사를 해보았지만 분노 거래소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조사를 하면 할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는 강한 충동. 그 때문인지 몰라도 회사에는 휴가를 내고 미친 듯이 수소문하였다.
그래도 별 소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빠의 증서를 카메라로 찍어 각 인터넷 자유게시판에 업로드 하였다. 제목은 언제나 『분노거래소를 아십니까?』 달리는 리플은 족족 욕 아니면 모르겠다는 반응. 여기서 조사는 마무리해야만 했다.
며칠 후. 회의 도중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당신의 분노, 감정해 드리겠습니다. 약도와 자세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주십시오.”
드디어 찾았다. 회의가 끝나고 바로 메일을 확인하였다. 순간 날 섬뜩하게 만든 문구.
- 난 너의 분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강한 이끌림이라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정신이 혼미해진다. 궁금해졌다. 나의 분노는 어떤 걸까. 오빠에 대한 복수나 분노거래소에 대한 궁금함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나의 허무주의는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하다고 온 몸으로 알리고 있었다. 자위나 격렬한 키스를 해도 얻을 수 없었던 말로 형용 못할 이 떨림, 전율. 가야만 한다. 가서 나의 분노를 평가받고 싶어. 돈도 받고 싶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
그래서 이렇게 가고 있건만 다리도 아프고 힘들다. 혹시 저기 저 건물인가.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네. 기분 나빠. 들어가기 싫다 정말. 어라? 저기 사람 한명 나온다.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왜 저래. 그냥 가지말까. 어? 내 쪽으로 오네. 저리가. 이 더럽고 냄새나는 놈아.
“아가씨. 혹시 저기 가려는 거요?”
“네. 왜 그러시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힘들게 왔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후줄근한 양복에 큰 네모란 안경. 벗겨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노숙자인가.
“아저씨가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지. 아가씨도 보나마나 분노를 팔거나 사러 온 걸 테고.”
“그래서요?”
“충고하지. 분노는 절대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게 아니야.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사고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그리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의 결말은 항상 베드엔딩이지.”
“이 아저씨가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재수 없는 소리만 하네. 이봐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어서 가던 길이나 가세요. 별 미친놈 다보겠네.”
갑자기 저 거지같은 게 지 시뻘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야 정말.
“하하하하. 어이가 없군. 내 충고를 거절한 대가는 언젠간 달게 받을 거요. 허영심으로 가득 찬 당신의 분노가 과연 어떻게 평가받을 지 내 지켜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흥. 도대체 저 곳이 뭐 길래 그러는 거야. 오기가 잔뜩 생기는데? 가자 그냥.
<긴 생머리의 키가 큰 젊은 여성 하나가 분노 거래소에 들어간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초라한 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마저 간다. 이윽고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또 다른 한 사람이 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인상적인 인테리어의 내부. 흡사 미술관에 온 느낌이다.』
N2: 검은 카드, 분노거래소
텁텁해. 차가 뭐 이리 써. 내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 이 거래소의 주인이겠지. 이목구비는 또렷한 게 젊었을 때 잘 생겼을 거 같아. 무슨 놈의 규정이 이렇게 많아. 다 헛소리지. 빨리 거래나 하자고.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상담인가요?” 조신한 목소리, 순진한 표정. 이것에 안 넘어가는 남자 없었다고.
“네. 상담은 제가 아닌 상담학과 교수인 제 아내가 진행할 겁니다. 옆 사무실로 들어가십시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은근히 내부는 넓고 고풍스럽다. 의외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일종의 정신병원? 나도 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드릴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답변해주세요.”
흥. 어차피 상담 이래봤자 다 거기서 거기야. 생판 모르는 남에게 내 진실 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보가 어디 있냐. 대충 대답하자. 내 목적은 오직 분노를 거래 하는 거니까.
30분 지났나. 생각보다 간단하면서도 정말로 몇 가지밖에 질문 안 했어. 그것도 대답하기 쉬운 보편적인 질문들이잖아. 한심해.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강조했던 단어 『Reverse』. 무슨 의미일까.
“다음은 평가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저와 제 딸이 같이 진행할 겁니다. 중요한 단계이니 저희들 지시에 잘 따라주셔야 합니다.”
“딸이라고요?”
“예, 저희 딸은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분노를 감별해주지요. 저는 그저 딸이 감별한 분노를 기준에 근거하여 돈으로 환산해 줄 뿐입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감별능력? 자기 딸이 초능력자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한번 보기나 하자.
사장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소녀. 한 8~9살 되어 보이나. 붉은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 새하얀 원피스. 또랑또랑한 눈과 오뚝한 코. 귀엽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제가 제시하는 3가지 물음에 솔직하게 답변해주시면 알아서 제 딸아이가 감별해 줄 겁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주시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상담하는 내내 저 여자아이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내 모습을 이리저리 훑고 있다. 떠보기 위해 거짓말을 중간 중간 섞어주었으나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쭉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에서 갑자기 소녀가 입을 크게 벌린다. 질문의 주제는 바로 “허무” 나의 허무주의에 대해 그동안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을 털어 놓자 소녀의 입은 점점 더 커져간다. 이윽고 허무가 내 삶의 전부를 지배한다고 답변했을 때 소리를 크게 지른다. 마치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괴물 사이렌처럼.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답변을 마치자 아이도 조용히 눈만 깜빡거린다. 끝난 건가?
“평가가 끝났습니다. 당신의 분노의 유형은 『허무』, 특이한 케이스군요. 오빠의 분노유형은 『저주』, 일반형이었는데 말이죠.”
“우리 오빠를 아세요?”
“물론이죠. 당신이 이곳에 올 거라는 것도 다 말이죠. 오빠일은 안 됐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에게는 일체의 책임이나 잘못이 없습니다. 단지…”
“?”
“규정을 어긴 것이라면 그 뿐일까요. 만약 어기지 않았더라면 오빠는 정신병원이 아니라, 외국의 고급 호텔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테지.”
“지금 놀리시는 건가요? 누구 때문에 오빠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난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르니 속은 좀 편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고요. 압니다. 자기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또 얼마나 값이 나갈지 알고 싶어 온 것도 있다는 사실을. 내 말이 틀렸습니까?”
사실 맞는 말이다. 오빠가 정신병원에 간 이후로 집안이 조용해지고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아예 영원히 거기서 썩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군요. 저는 당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는 겁니다. 언제까지고 무의미한 삶을 보내실 겁니까. 이제는 틀에서 벗어나셔야합니다. 특히 허무의 분노는 무척 희귀한 케이스라 높은 가격대가 예상됩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다시 확인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탁 막혔다. 오히려 저들은 자신의 잘못을 당당하게 얘기하지 않은가.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나 그들의 오만한 행동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벌써 나도 분노거래소의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그때 소녀가 내게로 아장아장 걸어온다. 그리고 내민 5장의 뒤집어진 카드. 그 중 한 장을 고르라고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준다. 얼떨결에 한 장을 집어 들어 바로 뒤집는다. 완전한 검은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
“당신을 만난 게 내게는 정말 행운이군요. 아주 특별한 분노를 지닌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검은색 카드를 뽑으시다니”
사장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한다. 아이가 갑자기 배시시 웃는다. 그러자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뭐가 좋아서. 저 아이, 내가 뽑은 카드를 나한테 내민다. 혹시 가지라는 건가.
“아이가 당신의 분노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당신과도 잘 어울리는 색깔이군요.”
『…사무실 위쪽에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말없이 방 안에 있는 우리들을 지켜본다.』
N3: 최고점수, 분노거래소
“자, 계약서입니다. 보시지요.”
낡은 양피지 한 장. 문구는 단 한 줄. 저게 계약서라고?
“작성하시면서 들으십시오. 상담한 내용과 분노의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 최고점을 기록하셨습니다. 몇 점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은데. 뭐, 최고점이라니까 들어보기나 할까.
“네, 몇 점인가요?”
“98점입니다. 평균 점수대가 60점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금액으로 거래하실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사실 거래금액이 사상 초유라 과연 거래가 될 까 해서요. 적정한 선이라면 모를까. 기존의 최고 금액이 3억 5천만 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시하신 500억은…”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보는데요. 오빠에 대한 보상도 그렇고 제 분노가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타입이라면서요. 분명 구매할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나도 미친년이다. 누가 봐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500억을 준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저 500억은 나의 자존심이다.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당당하게 나를 알리고 대변해주는 심리적인 가치. 포기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거래소에 등록은 하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 손이든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왜 그러시죠?”
“일종의 저와 당신의 신뢰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별꼴이야 정말.
“아얏, 뭐하시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뢰를 위한 특별한 의식절차라고. 이로써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지요.”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휴…이 짓거리도 계약의 한 부분이라면 참아야지.
“수고하세요.”
답답한 곳에서 나오니 숨이 확 트이네. 벌서 저녁이구나. 피곤해. 내일 모레 프로젝트 준비도 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아. 피를 흘려서 그런지 좀 어지럽네. 근처 마트에 들러 뭔가 좀 사가지고 가야겠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참 웃겨.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진짜로 분노를 살 사람이 있을까. 뭐,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빠도 돈을 받은 거겠지. 오빠한테 의논해볼까. 안 돼. 규칙 중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런데 무슨 불이익? 그걸 이야기한다고 해서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다는 거 아닐까.
누가? 어디서? 그냥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세간에 들키지 않기 위한 연막 아니야. 그래서 심리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오빠도 한 순간 미쳐버린 걸지도 몰라.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 궁금하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사는 거야. 의논해보자. 그 다음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녀가 언덕길을 내려가는 모습을 미스터 마와 그의 아내, 딸이 함께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다. 모두 무표정한 얼굴.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커튼을 친다. 이윽고 풀숲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열심히 종이에다 무언가를 적는다.>
『…누군가와 얘기를 속 시원해 터놓고 싶어. 머리가 혼란스러워.』
N4: 의논, 분노거래소
“여긴 왜 왔어.”
“오빠 보러 왔지. 요즘 어때?”
<정신병원 면회실. 동그란 작은 원형탁자에는 비쩍 마른 초췌한 남자 한명과 젊은 여자가 서로 마주보며 앉아있다.>
“무슨 일이야. 또 한 소리 하려고?”
“아니, 오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말하기 전에 약속해줘.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해야해. 알겠지?”
“말해봐”
“분노 거래소 알지?”
표정이 일그러지네. 좋았어.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어. 그래서 호기심에 거길 가봤거든.”
“야!”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가서 뭐했어?”
“뭐 했나니. 상담 받고‥”
“분노 팔았어, 안 팔았어?”
왜 저렇게 흥분하고 그러지? 쪽팔리게 진짜.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오빠.”
“똑바로 말해. 그 새끼에게 분노 팔았냐고.”
“지금 등록 중이다. 왜”
“당장 취소해. 너 미쳤어? 제 정신이야?”
“왜 그러는데. 나도 팔면 안 돼? 내 분노가 어떤 건지 알려주고 돈도 준다잖아.”
“미친년. 모든 것에 공짜는 없어. 반드시 대가가 있다고. 날 보면 모르겠어?”
“안 그래도 그 사람들이 오빠 이야기하더라. 오빠의 분노 유형이 저주라고. 내 분노 유형은‥”
“말하지 마. 규칙 몰라?”
“내 분노는 허무, 특수형이래.”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내가 너무 소리를 크게 질렀나.
“선생님. 면회실에는 다른 환자분과 가족들도 있는데 소리를 크게 지르시면 어떡합니까.”
꼴에 간호사라고 깐깐하게 굴기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조용히 하겠습니다.”
“면회 끝났습니다. 병실로 가고 싶어요.”
쟤는 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빠‥”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지금이라도 가서 취소하고 계약서 불태워버려.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난 오빠와 의논하러 온 거라고. 얘기 다 안 끝났단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 된 지 알아?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거래한 사실을 술김에 털어 놓았거든. 돈 때문에 분노를 많이 판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것도 아마 규칙을 어겨서 일거야. 그리고 난 들었어. 규칙을 어긴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를.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다 너를 위해서야. 명심해.”
오빠의 뒷모습이 왠지 기운 없어 보인다. 피곤해서 그런가. 오빠의 몸에서 짙은 갈색의 아지랑이가 보이는 거 같아. 그런데 진짜 뭐야. 그 놈의 규칙, 규칙, 규칙. 재수 없는 새끼. 그래 너 따위한테 의논하러 온 내가 병신이지. 거기서 평생 있어라.
<잔뜩 찡그린 표정의 여자가 거칠게 의자를 집어넣으며 면회실을 나간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걸음을 도중에 멈추어야만 했다. 로비에 자리한 대형TV에서 한 이름이 알려진 해운업계의 CEO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몇 달 전 분노거래소 입구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나, 나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 너무 두려워』
N5: 불안함, 분노거래소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의 교통사고? 설마 저 남자도 규칙을 어겨서 저렇게 된 거야?
<여자의 방.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는 여자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손에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잘못됐어. 믿을 수가 없어. 경찰에 신고할까. 확실히 사고가 아닌 살인이야. 사장이 그 사람을 입막음시키려고 죽인 거라고. 그럼 어떻게 규칙을 어긴걸 알았을까. 그래. 도청장치. 어딘가 있을 거야. 만약 있다면 나도 곧…
<여자가 몸서리치며 미친 듯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 이내 자신의 소지품과 방 안 구석구석을 다 뒤진다.>
없어. 없다고. 도청장치가 아닌가. 아니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몸으로 배출되거나 떨어져나가는 타입인가. 진짜 뭐냐고. 미치겠어. 오빠도 그럼?
<순간 여자의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3106호실 환자의 동생분이신가요? 보호자분이랑 연결을 시도해봤는데 도저히 연락이 안 되어서요. 급히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분이 병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요.”
“뭐라고요?”
“저희도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 혹시 오빠 분께서 자주 가는 곳이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나요?”
혹시 나 때문에…설마!
“한 군데 있긴 해요.”
“거기가 어디죠? 말씀하시면 바로 그 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말해야하나. 말해줘도 어딘지 모를 텐데…
“분노거래소”
“네?”
“분노거래소요.”
“거기가 어디죠?”
의외로 침착한 반응. 놀랄 줄 알았는데 좀 실망이네.
“제가 그 곳의 약도를 가지고 있어요. 바로 전송해 드릴 테니 보시고 빨리 와주세요.”
“네. 혹시나 발생할 사고를 대비해 이미 경찰에도 신고해놓았습니다. 경찰에게는 저희가 다시 얘기 할 테니 병원으로 오지 마시고 그 곳으로 바로 가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 날 것만 같아. 전부 나 때문이야. 오빠, 제발 내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무사히 있어줘.
<황급히 집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그녀의 모습을 어떤 남자가 전봇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적는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서로 연관도 있다. 단단하게 얽혀져있는 거미줄처럼. 그렇게 나도 붉은 거미에게 잡아먹힌다.』
N.E: 핏빛 거미줄, 분노거래소
<늦은 밤. 평소 같았으면 굳게 닫혀져 있을 철문이 반쯤 열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거래소 안으로 들어서자 풍겨져오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여자는 코를 틀어막으며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이봐요. 괜찮아요?”
살펴보니 전에 상담을 담당했던 여 교수잖아.
“가면 안 돼. 위험‥헉”
출혈의 정도가 심해. 이대로 놔두면 저 사람, 죽을 거야.
“곧 있으면 경찰하고 구조대가 올 거예요. 지혈할 걸 찾아볼게요.”
“됐어‥요. 이제는 막을 수 없어. 내‥내 딸 아이가…”
“누가 그런 것인가요. 제발, 죽지 말아요.”
“이‥이걸, 이걸 남편에게‥”
그녀의 피가 흥건히 묻은 작은 다이어리다. 여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져 있을까‥일단 보는 건 나중으로 하고 서둘러 올라가자. 오빠가 위험해.
<여자의 다이어리를 품 안에 넣고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간다. 나무판자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올라갈 때마다 삐거덕, 삐거덕 소리가 난다. 그리고 2층에 다다르자 들리는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 맨 끝 큰 사무실에서 나오는 환한 불빛을 따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개수작부리지마.”
“진정하게. 그리고 그 칼 내려놔. 우리 대화로 풀어 보자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전해져오는 다급함과 광기. 피로 붉게 물들어진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오빠는 한 손에는 소녀의 머리채를, 다른 한 손으로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식칼을 아이의 목에 대고 있었다. 그와 마주보고 있는 미스터 마는 한 손으로는 왼쪽 눈을, 다른 한 손은 긴 사무용 책상을 집고 있었다.>
“오빠”
“저리가. 내가 모든 것을 끝내겠어. 이 지랄 맞은 저주를”
“그러지마 제발. 여기로 경찰하고 구조대가 올 거야.”
“상관없어. 애초부터 분노 따위를 거래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여기는 또 하나의 정신병원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파괴하지. 원흉을 제거하면 나나 너나 거래한 모든 사람들의 저주가 풀릴 거야. 내가 총대 메고 희생한다고.”
“나는 상관없으나 내 딸 아이 만큼은 살려주게.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당장 계약서 불태워버리고 내 눈앞에서 죽어버려. 그럼 이 계집은 살려 줄게.”
“그거면 되겠나?”
“장난처럼 보이지?”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아이의 목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온다. 이 모습을 본 미스터 마는 서재에서 두꺼워 보이는 계약서파일을 가지고와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린다.>
“좋아. 좋아. 이제 죽어.”
“죽기 전에 하나 물어보지. 자네는 궁금하지 않나.”
“뭐가.”
“어떻게 이 분노거래소가 생겨났고 도대체 분노를 왜 사고 파려는지”
“그딴 건 관심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여기가 송두리째 흔적도 없이 파괴되는 거야.”
“오빠, 이제 그만 됐어. 하지 마.”
“넌 가만히 있어.”
이제 다 끝났어. 오빠는 살인자로 경찰에 잡혀 무기징역 아니면 중형을 받게 되겠지. 나와 우리 가족은 범죄자 집안이라고 사람들에게 낙인찍힐 테고. 내 인생도 마찬가지겠지. 아,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제 아내가 유품으로 남긴 다이어리가 있을 겁니다. 혹시 올라오다가 받으셨나요?”
다이어리? 혹시 이걸 말하는 건가.
“네.”
“제게 건네주십시오.”
“여기에 무슨 내용이‥”
“주지 마. 주면 너도 가만 안 놔둬.”
“당신 오빠도 막고 이 상황도 같이 끝내려면, 반드시 그 다이어리가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경고했어. 주는 순간 전부 황천길이야.”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나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단순한 호기심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해 낼 줄이야. 그것도 나의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그렇다면 끝내고 싶어. 다 죽더라도 또 다른 피해자나 희생자를 낳아서는 안 돼.
<여자가 다이어리를 미스터 마쪽으로 던진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아이를 있는 힘껏 벽 쪽으로 밀어버린 채 여자를 향해 돌진한다. 미스터 마는 다이어리를 펼친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 남자는 여자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 미스터 마의 말을 들은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피와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넌…넌 옛날부터 그랬었어. 그러게 왜, 왜! 내 말을 안 듣냐고. 이 멍청아.”
너무 아파. 숨을 못 쉬겠어. 그래도 다행이야. 그들이 올라오고 있어. 진짜 나도 바보라니까. 못난 오빠 때문에 허무하게 죽게 되잖아. 이것도 규칙을 어겨서 그런 건가. 가지말 걸. 아니, 아예 분노거래소가 없었더라면 오빠도 나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엄마, 아빠. 미안해요.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분후, 계단을 올라가는 수십 명의 발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러 퍼진다. 경찰이 피 묻은 식칼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남자를 보더니 바로 제압한다. 구조대는 미스터 마와 소녀, 여자의 상태를 살핀다. 미스터 마는 한 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고 소녀는 기절하였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다행히도 큰 부상은 당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었고 구조대에 의해 들것에 실린다. 얼굴에는 뜻 모를 옅은 미소만을 남긴 채
다음 날, 각 언론사들은 일제히 『엽기적인 일가족 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로 사건을 보도한다.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분노거래소에 대한 전모를 알게 된 국민들은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가해자인 여자의 오빠는 1심과 2심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고 얼마 후 집행되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여자와 그 오빠의 부모가 사건이 일어나던 밤 의문의 사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수사를 통해 밝혀진 거래소의 고객명단과 감추어진 다른 사건들로 인하여 미스터 마 또한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증거가 충분치 않아 1심에서 무기징역의 판결을 뒤집어 2심에서는 10년으로 낮추어 선고받게 된다. 소녀도 고아원으로 보내어져 몇 년을 지내다 어느 한 가족에게 입양된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 무렵. 한 때 크게 이슈화 되었던 『분노거래소』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 간 채 도시전설로 변질되었다. 거래소는 원래는 철거를 할 예정이었지만 관련 부지에 대한 시와 주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그대로 놔둔 상태였다. 무성한 잡초와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쪽으로 잘 가지 않았고 괴상한 소문들로 인하여 땅값 또한 천정부지로 떨어져 그 근처에 살던 주민들도 속속들이 떠나갔다.
그러자 거래소 일대는 출입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고 최근 시와 지역주민이 극적으로 타협, 그 근처에 대한 개발허가가 떨어지면서 다시 개방해 놓은 상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괴상한 소문과 현상으로 저녁이나 밤에는 오가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때 미스터마가 교도소에서 출소한다. 세상에 대한 복수와 분노거래소의 재건을 위해.>
『연락이 왔다.』
R11: 의문의사나이, 몽블랑, 분노거래소.
벌써 두 달이다. 그런데 연락은커녕 이건 뭐 순전히 사기당한 느낌이다. 참, 나도 한심하지. 100억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에 바로 휴학계 내버리고 군대도 연기해버렸잖아.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연락이 안 오면 다시 찾아가보자.
- 발신자번호제한 -
왔다. 왔어. 분명히 미스터 마다. 사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떨린다. 드디어 내 손에 100억이 들어온다.
“네.”
“J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 목소리는 미스터마가 아닌데. 누구야 당신.
“누구시죠?”
“오늘 오후 7시에 만나고 싶습니다. 몽블랑 아시죠? 그럼 그때 뵙죠.”
전화가 끊어졌다. 그런데 방금 뭐지. 어이가 없네. 내가 나갈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내 코드명을 알고 있을까. 혹시 분노거래소와 관계가 있다면 구매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가야 하나.
7시다. 여전히 내 방이다. 과연 전화가 올까.
- 발신자 번호 제한 -
왔다. 받아보자.
“네.”
“오고 계십니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난 좀 쳐볼까.
“제가 준비할 게 많아서 좀 늦을 것 같은데요.”
“지금 방안에 계시는 거 다 압니다. 저를 떠보시려면 좀 더 준비를 하셨어야죠.”
눈치 챘나. 근데 저 싸가지 없는 말투 좀 봐. 은근 화나네.
“저기요. 제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당신을 만나야 하는 겁니까.”
세게 나오니 아무 말 못하는 거 봐라. 그러게 어디서 까불어.
“분노거래소”
거길 어떻게. 설마 진짜로 구매자인가.
“혹시 구매자신가요?”
“몽블랑으로 오면 알게 되겠지”
<카페 몽블랑 안 구석진 자리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바깥풍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탁자 위에는 카메라와 서류봉투, 노트북이 있었고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와 인상은 흡사 미스터 마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했다.>
저 사람인가. 딱 봐도 싸가지 없게 생기긴 했네. 어라. 날 본건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K입니다.”
저게 날 따라하나. K라‥한글로는 ㄱ, 컴퓨터키보드로는 Z, 영어로는 Know, Knight 소설에서는 수수깨끼의 인물. 별난 사람이군.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죠? 그리고 어떻게‥”
“분노거래소를 알았냐고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대답하잖아.
“네. 혹시 제 분노를 구매하시려고?”
“그건 아닙니다.”
장난치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제기랄.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어. 저런 또라이에게 놀아난 내가 병신이지.
“어떻게 제가 분노거래소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보나마나 당신도 나처럼 분노를 거래했겠지.”
“반은 맞췄고 반은 틀렸습니다.”
이 뭔 개소리야.
“그게 무슨 말이지?”
“방금 말한 그대로입니다. 확실히 저는 분노를 판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노거래소에서 판 게 아닙니다.”
“그럼 분노거래소 말고도 분노를 취급하는 곳이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분노 거래소는 그곳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저 자식.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이봐 당신. 다짜고짜 불러내서 뭐하자는 거야. 그렇게나 할 일이 없어?”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부끄럽다.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다. 괜히 소리쳤나.
“제가 당신을 보자고 한 이유는 분노거래소에 대한 실체를 알려드리기 위해섭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거래소의 비밀을 말씀드리려 부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분노 거래소의 비밀? 궁금하기는 했어. 그때의 그 일기장에 적혀져있던 『그것』. 나만이 알고 있었던 혼자만의 비밀이 어떻게 거기에 적혀있었을까. 거울에 비춰진 소녀의 모습. 그리고 미스터마가 말했던 나와 비슷하다는 의문의 여자.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진정되었으면 자리에 앉으십시오.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목숨 걸고 조사한 분노거래소에 대한 실체를.”
그때 보지 말았어야 했다. 나까지 그 일에 휘말릴 줄은 몰랐으니까.
『어둡고 캄캄한 터널에서 몇 줄기 빛이 보이는 그 느낌. 실체를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더 멀리 날아가는 단서들. 머리가 복잡하다.』
R12: 비밀, 단서들, 분노거래소
“이것이‥”
“보시는 대로 맞습니다. 그것이 분노 거래소가 생기고 사라졌던 원인이죠.”
의문의 여자가 남긴 자료들. 그녀의 일기장. 피 묻은 검은색 카드. 거래증서. 그리고 분노를 거래하였던 사람들의 최후가 기록된 K의 노트.
“분노거래소는 엄연히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그러게 믿고 있는 것 뿐 이지요. 방금 전의 당신처럼. 한 때 저도 사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어 그곳을 방문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호기심도 들었습니다. 과연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사고 팔수가 있을까. 남의 감정이 내 것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무엇으로? 과학기술로 아니면 심리치료로? 의문점이 많이 들었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그의 모습에서 J는 왠지 젊은 시절의 미스터 마가 자꾸 겹쳐 보인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엇보다 말 속에 담겨져 있는 날카로운 면도칼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 불편함을 준다. 커피를 마시던 그가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오래된 기사 하나를 J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엽기적인 일가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로 보도된 기사입니다. 바로 분노거래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죠. 줄쳐진 곳을 보시면 가해자는 사형, 미스터 마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죠. 그의 딸은 지방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어 몇 년을 지내다 한 재력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것이 세간에 알려져 있는 위 사건의 결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뭐죠?”
“분노를 거래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제 노트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사건 이후로 분노를 거래하였던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큰 상해를 입게 됩니다. 아주 『우연한 실수나 사고』로 인해서 말이죠.”
“설마 미스터마가 아닌 다른 제3의 인물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사실 저도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누군지를 찾기 어렵더군요. 수사기록에 의하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 생존자는 5명 중 3명뿐이었거든요. 이제는 2명이지만.”
“계속 말씀해주세요.”
“분노거래소가 정확히 언제 세워졌고 또 얼마나 많은 고객들이 이용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렵사리 충격적인 정보를 소식통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전에 제가 이것을 말하기 전에 당신도 제 일에 협조를 해주셔야합니다.”
역시 무언가가 있었군. 들어나 보자.
“그리 어려운건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되지는 않거든요.”
“얘기해주세요.”
“분노 거래소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다시 그를 법정에 세워 영원히 사회로 나올 수 없도록 감옥에서 매장시켜야합니다. 분노거래소와 관련된 정보나 자료들은 윗분들‥아니 전부 폐기시켜버리고요. 그가 출소하고 나서 허황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을 더 이상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또 모르잖아요. 거래한 나나 당신이나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그를 신고한다거나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은 자주 들었기는 하지만 분노거래소 자체를 없앤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딱히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첫 거래여서 그런지 신경을 쓰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고 자료를 살펴보니 심히 동요된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 힘을 빌려 주시겠다 이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존재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는”
“상식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소멸시켜야 합니다. 이유 따위는 없어도 말이죠. 좋아요. 그럼 나도 당신에게 선물을 드리지요. 소식통이 전한 정보에 의하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스터 마의 아내는 놀랍게도 살아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복부에 피가 철철 흘렀다고 기록되어있지 않은가.
“저도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믿지 못 했습니다.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그것도 구조대가 나타나기 전 사라졌다는 말은 기어 나갔다거나 뛰어 나갔다거나 숨어있다 빠져나왔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거나. 이 중 하나겠지요. 아무래도 그녀가 자기 딸과 남편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거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지금까지? 뒤에 무언가 더 있다는 건가.
“참고로 분노거래소는 원래는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정신병원이었다고 합니다. 원장은 당연히 심리학과 교수였던 그녀가. 조수는 그녀의 남편인 미스터 마죠. 하지만 위치도 위치거니와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당연히 입소하는 사람도 없으니 운영이 힘들어 졌을 겁니다. 분노거래소로 명칭이 바뀐 것도 처음에는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한 일종의 홍보수단이었을 겁니다.”
왜 분노거래소로 이름을 지었을까. 정말로 홍보를 위해서였을까. 잠깐‥
-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분노를 제대로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아니면 나약하고 병든 자신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원동력을 찾고 있다면? 거래하자. 전자에게는 분노해소를, 후자에게는 변화계기를 제공해주는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자. -
“J씨. J씨. 제 얘기를 듣고 있긴 합니까?”
“…알겠습니다.”
“뭐를요.”
“분노거래소 명칭을 바꾼 이유를”
“그게 무엇입니까?”
“모든 정신병은 인간의 감정 중 『분노』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분노를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풀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우울증이나 조울증, 심지어 싸이코패스로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지죠. 적절하게 분출하는 스트레스나 분노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이롭다고들 흔히 말하잖아요. 그런데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그러한 분노들을 표출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은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미스터 마도 아마 그러한 맥락에서부터 시작한 듯 보입니다. 그가 말하길…”
<J는 K에게 자신이 상담을 받았을 때 미스터 마가 해주었던 분노거래소의 존재이유를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단 말이죠?”
“네. 당신이 말한 분노거래소가 원래는 정신병원이었다면, 설립목적 또한 이에 연관되어 있는 건 당연하겠죠. 궁극적으로 자신의 치료이상론을 시험해보기 위한 마루타들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역시 부르길 잘했어. 그녀가 가진 치료이상론을 펼치기 위해 분노거래소를 설립했다는 가설, 신빙성이 갑니다. 분노를 활용하여 사람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본능적 욕구를 일깨워주는 치료…오묘하군.”
“확실히 그녀가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서 이와 비슷한 행위를 또 다시 저지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미 분노거래소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K씨. 당신은 누구에게 분노를 거래했습니까. 또 어떻게 이런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물어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알려줄 때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대신 이것만은 확실히 답변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내일 오전 9시에 다시 이곳 앞에서 보지요.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모든 걸 알려 드릴 것이니 오늘은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쳇. 허세부리기는.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걸로 만족해야하나. 내일 그곳으로 가봐야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좋습니다. 그럼 뵙겠습니다.”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저는 생각 할 게 있어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J의 표정이 어둡다. 고민이 많은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몽블랑을 나선다. 힘없이 터벅터벅 걷는 그의 모습을 K는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리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마음이 춥다. 온 몸이 저려온다. 슬픔과 고뇌의 감정 폭풍우가 여기 이곳으로 몰려온다. 나도, 그녀도.』
R13: 뜻밖의 만남, 엘리자베스, 분노거래소
오전 9시. 강렬한 햇빛이 내 머리를 강타한다. 덥다. 주변에는 흔한 출근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차들의 소음. 어딘가에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난 조용히 카페 앞을 서성거리며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본다. 무언가 우쭐해지는 이 기분. 그때 검은색 스포티지 한 대가 내 앞 도로변에 정차한다. 창문이 올라가고 어제 보았던 K가 얼굴을 내밀며 내게 소리친다.
“타세요.”
어디론가 향하는 차. 1시간은 지났을까. 여전히 같은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는 지 눈이 점점 감긴다. 이때 그가 나에게 한 손으로 안대를 건네주며 말한다.
“졸리면 이 안대를 쓰고 주무십시오. 단,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대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풀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시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대를 받아 바로 쓴다.
“일어나세요. 다 왔습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더 자고 싶은데‥조금만 더 있었으면 한 때 좋아했던 그녀와 격렬하게 한 바탕 했을 텐데‥아쉽다.
“눈부셔”
깊은 산 중. 내 앞에 작은 통나무집이 보인다. 고요한 주변. 음산하다.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전 밖에서 기다리죠.”
같이 가는 게 아니었나. 저 안에 누가 있다는 거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어두 캄캄한 내부. 그리고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
“J씨인가요. 어서 문을 닫아주세요.”
오싹한 이 기분. 그 상황에서 크게 화라도 내거나 소리를 쳤을 법 한데 자연스레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른다. 문을 닫으니 완벽한 어둠이 찾아온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무거운 공기. 차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하나 둘 양초가 켜진다. 몇 개 안되었지만 켜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그리고 이제야 그녀의 모습을, 아니 얼굴이라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초점 없는 눈. 입에서는 항상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듯 연신 씰룩거린다. 오뚝한 코와 큰 눈망울, 붉은 입술은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파란 원피스와 가느다란 다리. 그리고 볼륨감 있는 몸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성숙된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일반인들과는 다른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모습, 분위기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못하는 방어기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가시가 많은 장미라고 보면 될라나. 그것도 날카롭고 맹독이 묻혀 있는, 그러나 이 세상 누구보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치명적인 매력의 꽃.
“반가워요. 제 소개는 조금 있다 하도록 하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미스터 마를, 아니 우리 아버지를 없애주세요.”
뭐라고?
“더 이상 아버지의 피의 복수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요. 전 두려워요. 예전처럼 그 일이 다시 발생할까봐…”
그녀가 눈물을 흘린다. 내 가슴 한 구석도 시려온다.
“저기‥”
“미안해요. 그때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만…”
“K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분노거래소에 대한 얘기들을.”
“그것이 전부는 아니랍니다. 제가 오늘 당신을 보자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제게 말씀하려고 하는 건데요?
“분노거래소는 환상입니다. 저의 환상이기도, 모든 이들의 환상이기도 하죠. 처음 거래소가 정신병원을 모태로 해서 지어졌다는 것은 이미 들으셨겠죠. 하지만 여기에 하나 빠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미치광이로 변한 것은 바로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네. 제가 태어나기 이전, 아버지는 전도가 유망한 외과 의사였습니다. 어머니는 한 대학의 심리학 조교였고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나 저를 낳게 되었는지는 구구절절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관심도 없을 테지요. 처음 개인병원을 차리자는 의견에 아버지는 반대했다고 해요. 바로 어머니의 그 『치료이상론』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어머니는 물론, 미스터 마 또한 주장한 것인데요. 그렇다면 미스터 마도 그 이상론에 동조한 거 아닙니까?”
“아니 예요. 아버지는 거래소 설립에도, 이상론을 주창하는 어머니의 의견에 심하게 반대를 하셨어요. 말이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셨을 수도 있고 비용적인 측면도 있었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반대하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 모의실험을 한다는 점이었어요.”
“모의실험?”
“어머니는 사람의 감정과 관련한 무언가 실험을 해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는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나 봐요.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면서 자극적인 감정인 『분노』를 가지고 말이죠. 오늘날 사회에서 발생되어지는 비상식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을 통제해야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계셨다고 해요. 더 나아가 통제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세뇌, 전파함으로써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도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조교시절, 연구실에서 사람의 감정에 대한 모의실험을 통하여 축척된 자료들을 가지고 『Reverse 프로젝트』라는 새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 프로젝트? 점점 일이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
“예전 어머니의 연구일지를 몰래 보면서 안 내용이니 믿으셔도 좋아요. 안 믿으면 할 수 없고요. 아버지도 어머니의 프로젝트를 알게 되면서 두 분이 싸우시는 횟수가 잦아졌어요. 그런데‥그런데 결국 아버지 또한 어머니에게 세뇌당하고 말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프로젝트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어머니의 일을 옆에서 보조하기까지 하였으니까요. 처음에는 다른 의도가 있겠거니 생각했었지만 그건 저의 큰 착각이었어요. 어머니보다 더 악랄하게 분노를 거래하러 온 사람들을 이용해 먹었으니까요.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정기간동안 관찰을 통해 피 실험체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지를 살펴본 뒤, 그 기간이 끝나면 『폐기처분』한다는 것이었어요.”
“폐기처분?, …혹시."
"의문의 교통사고, 자살, 심한 상해…그것들이 전부 우연이지는 않지요. 누군가를 시켜서 그랬든 아니면 직접 그랬든 말이죠. 저는 두려웠어요. 사람을 소모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어머니가 무서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터진 것이죠.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은…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또…“
그녀가 운다. 소리 없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울음으로 참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가족은 흩어지고 말았어요.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감옥에, 저는 고아원으로…거기서 지낸 몇 년은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살인자의 딸, 정신병자의 자식으로 또래 애들에게 불리며 심한 괴롭힘과 놀림을 받고 살았었죠. 그러다 지금의 제 양아버지가 저를 거두어 주셨고 이렇게 당신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양아버지는 저의 가족사를 모두 알고 계셨더라고요. 부모 없이 지낼 제가 불쌍하게 느껴진 나머지 동정을 베풀어 입양했다고 고백하셨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K씨와는 알게 되었습니까.”
“제 양 아버지의 비서예요. 굉장히 유능하고 멋지신 분이죠. 고통 속에 살던 저에게 작은 힘이 되어주신답니다. 그도 한 때 분노를 거래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나요.”
“예. 직접 말하더군요.”
“그럼 어디서 거래했는지도 말해주던가요.”
“아뇨, 그거는…”
“그는 분노거래소에서 거래한 게 아니 예요.”
“그렇다면 어디서입니까.”
“바로 분노거래소로 명칭 바뀌기 이전, 즉 『Persona』라고 불렸었던 부모님의 개인정신병원에서였습니다.”
“그의 분노의 유형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는 몰라요.”
“그가 말하길 어린 시절의 당신은 분노를 감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순진하시군요. 그것은 순전히 저의 연기였어요. 사람의 감정은 함부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아시잖아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킨 일종의 연극이라고요.”
“그럼 나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이 전부 프로젝트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네. 현재 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K씨, 그리고 당신 세 사람 뿐 이예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도, 알려져서도 안 되는 숨겨진 이야기이기에.”
“그렇다면 왜 굳이 절 선택한 겁니까. 저는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그저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요.”
“모르겠어요. 처음 K가 최근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명단을 제게 보여주었을 때는 별 관심도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분노거래소가 다시 문을 열고나서 생긴 첫 희귀형 분노소지자라는 점과 무언가 신뢰감을 주는 당신의 눈을 보고 확신했어요. ‘이 사람이라면 할 수 있겠구나’ 라고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K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곧 당신의 분노를 살 구매자가 연락이 올 거라고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세요.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만나 설득해주세요. 아무도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이 상처가 욱신거리거든요.”
<여자가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킨다. 일자로 그어져있는 흉터. 다행히 자국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J와 이야기하는 내내 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아픔을 잊어보려고 한다. 오두막 밖에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K가 보인다.>
『팔렸다. 나의 분노가. 그런데 석연치가 않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본다. 납득은 간다. 그러나 무언가 기분이 찝찝하다.』
R14: 구매자, 음모, 분노거래소
몇 달이 지났을까.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며 있다. 전화는 감감 무소식.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를 태운다. 하.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통나무집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계속 생각이 난다.
- 가시는 건가요. 그럼 잠시 만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사실 특별한 이름은 없어요. 기억나는 게 없거든요. 그저 K씨나 당신처럼 코드명으로 정했는데 이상하게 보지는 마세요. 어렸을 때 엘리자베스라는 인형을 좋아해서 엘리자베스나 E라고 불러주세요.―
한글로는 ㄷ, 컴퓨터 자판으로는 L, 영어로는 Elite, Emotion, 알파벳에서 다섯 번째 글자.
그러고 보면 미스터 마는 마 씨니 M인가?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번호제한-
K인가. 받아보자.
“여보세요.”
“혹시 특수형-복수의 분노가 선생님께 맞소? 며칠 전에 구매한 사람인데.”
드디어, 드디어 기다리던 구매전화다. 우선 침착하자.
“네. 미스터 마를 통해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물론. 우리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지금 가능한가요.”
갑자기 왜 만나자고 그러지. 이미 거래했으면 끝난 거 아냐. 설마 반품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조금 떠 볼까.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였습니까.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만나기 힘들면 제가 직접 찾아가죠. 아니면 오늘 오후 7시 그랜드호텔 라운지에서 뵙겠습니다.”
내 마음이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쉽사리 일어나 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가야만 한다. 소중한 구매고객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쳐보자. 아무 생각 말고.
<그랜드호텔 라운지. 통째로 예약하였는지 안에는 텅 비어있다. 단, 가장 가운데 상석만을 제외하고는. 푸짐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중앙에는 한 노신사가 조용히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음미한다. 옆에는 날카로운 눈매와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라운지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잖아. 저기, 저 사람들인가. 확실히 200억을 가진 사람들은 재력가밖에 없겠지. 쫄지 말고 당당하게 가자. 가만, 저 젊은 사람은 설마.
“회장님, 왔습니다.”
“어서 오라고 하게.”
<쭈뼛거리며 남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는 J. 안내해준 남자는 바로 K였다. 노신사는 J를 지긋이 바라보며 와인 잔을 든다.>
“건배하지. 이래 뵈도 구하기 꽤 힘든 유명한 와인이라고.”
“아, 네.”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 와인을 억지로 비우는 J. K는 그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본다. 노신사가 손짓으로 K를 불러 무언가를 건네준다.>
“한번 읽어보게.”
<K가 건네준 그 무언가는 바로 오래된 신문의 기사. 기사의 제목에는 ‘분노거래소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 이와 연루된 사람들?’이라 쓰여 있다.>
“형광펜으로 줄쳐진 곳을 자세히 보게.”
<J가 기사 중간에 형광펜으로 칠해진 문구를 유심히 본다.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들 중에는 국내 해운업계의 큰 손, 임 모씨도 연관되어있다. 임 모씨는 같은 업계 경쟁사 CEO이자 오랜 친구였던 박 모 씨가 최근 들어 자신의 회사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폭언을 연일 일삼자 격분하여 그가 자주 다니던 골목길 앞에서 차를 타고 대기, 박 씨가 보이자마자 고의로 들이박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 임 모씨는 박 모 씨를 차로 들이박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임 모씨가 직접 경찰에 진술한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그 당시 다른 거래처와의 미팅 때문에 모임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던 도중 갑작스레 정신을 잃게 되었고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인 박 모 씨가 자주 다니던 골목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니 피해자인 박 모 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곧바로 119구조대에 신고하였으나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내가 바로 그 가해자라네.”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난 정말로 죄가 없어. 다행히 손을 좀 써서 형량이 낮춰지기는 했지만 내 잃어버린 시간들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그래서 분노거래소를 없애시려는 겁니까.”
“자네가 얘기했나. 아니라면 저 친구 상당히 이해가 빠르군 그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늙은 노인네가 바로 살인범이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자네의 분노를 사들인 이유도 다 작전의 한 일환이지. 뭐 돈은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네. 이번 일에 대한 대금이라 생각하고 받게. 자네 나이또래에 그 정도 액수면 상당한 거라고 보는데. 평생 만져보지도, 다 써보지도 못 할 그 200억을 말이야.”
날 호구로 봤군. 돈에 미친 노예로.
“솔직히 애들 데리고 그곳으로 가 다 때려 부셔버리면 그만이야.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주 고통스럽고 기억에 잊지 못할 방식으로 복수해주고 싶기 때문이야. 뭐,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말이지. 하하하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미쳤어. 난 그저 저들에게 이용당하는 장난감일 뿐이었어.
“최근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이 자네밖에 없었다는 점과 희귀형의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축복이었지. 작전을 실행할 좋은 미끼를 얻었으니까. 그렇다고 기분나빠하지는 말게. 세상사는 게 속이고 속고,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거 아니겠나. 대신 섭섭지 않게 보상도 해주었고.”
“솔직히 말해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긴 했었어. 그렇지만 속으로만 몇 백번이고 실행시켰지, 실제로는 하지 못했거든. 이놈의 양심과 도덕 때문에. 아주 작게 남아있던 내 안의 이성의 끈이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 친구가 살해당한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내가 정신이 말짱해있을 때 그랬더라면 후회하지는 않지. 감히 나를 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한단 말인가.”
<임 회장이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주먹으로 세게 식탁을 내리친다. 그 충격에 의해 접시 몇 개가 쨍그랑하고 소리를 내며 깨진다.>
“좀 흥분했군. 아무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 물론 직접 미스터마를 죽이는 건 자네 손으로 해야겠지. 내 손으로 하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고 좀 그래. 그렇지만 젊은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가 있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네. 그러나 가능하면 죽여 달라 이 소리지. 살인청부는 아니니 오해 말게. 분노 거래소만 없애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 저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해를 못 한 거 같아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말해주지. 자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야. 미스터마를 만나는 것과 죽이는 것. 나머지 뒤처리는 우리가 하겠네. 해주겠나.”
“J씨. 본의 아니게 설명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워낙 중대한 사항이라 조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추후에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부담 갖지는 마십시오. 이 일을 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죽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회장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진짜로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를 죽이라는 건 바로 그의 『몰락』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다이어리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그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가져와주십시오. 쉽지 않은 일이니 필요한 게 있다면 모든 지 지원해 드릴 겁니다.” K가 최대한 미안하다는 말투로 내게 말한다.
그때 보았던 일기장. 나의 모든 것이 적혀져있던 그게 핵심이었다니. 진작 가져 올 걸 그랬나.
“거래가 끝났으니 아마 조만간 그놈에게 연락이 올 걸세.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게 그 일기장을 가져오게. 만약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면 추가 보수를 주도록 하지. 만족스러워 미칠 정도로 말이야. 내 용건은 끝났네. 마저 음식을 먹던지 먼저 가도 상관없네.”
“하나만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말해보게.”
“미스터 마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오, 그래. 뭐가 적혀져있던가. 또 어디에 있었고.”
“일기장은 미스터 마의 사무실 뒤쪽 벽난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사실입니다.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빈 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져오게. 혹시 모르지 않나. 특수잉크로 쓰여 있든가 무언가의 장치는 분명히 해 놓았을 테니.”
“일기장에 무엇이 적혀 있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겁니까.”
“알고 싶나. 가지고와. 그럼 내 직접 보여줌세. 나의 무죄를 입증하고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게 담겨져 있지. 이제 됐나.”
“추가보수.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을 끝으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운을 빌겠네.”
<J가 라운지에서 나가자 임 회장은 K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 지시를 듣는 K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압박감이 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내키지가 않아.』
R15: 맞대면, 일기장, 분노거래소
“잘 지내셨나요. 미스터 마입니다.”
“네. 거래는 완료되었는가요.”
“물론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관리 기간이 어제부로 끝나 오늘 전화 드린 겁니다. 다행히 기간 내 규정을 잘 지키셨군요.”
“구매자는 알고 있던데 그거는 상관없습니까.”
“물론이죠. 분노거래소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규정이 적용됩니다. 그 외에는 상관없습니다. 오늘 오후에 방문해주실 수 있습니까.”
“좋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또 다시 올라가는 언덕길. 생각만큼 힘들다거나 가파르게 보이지 않는 건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 굳은 나의 각오가 정신력과 체력을 지탱해준다. 그저 빨리 거래소에 들어가 거래를 끝내고 일기장도 손에 넣고 싶은 마음 뿐. 내 발걸음이 전보다 두 배나 빨라진다. 조급해 하지말자.
거의 반 년 만에 다시 온 분노거래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음산한 분위기. 녹슨 철문을 힘껏 열며 거래소 안으로 들어선다. 아니, 들어서려다 잠시 멈췄다. 혹시 다른 곳 아닐까라는 착각까지 하게 만들 정도로 내부가 달라져있었다. 환한 불빛,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초라하고 어두운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고급 양옥집 같다. 그러나 여전히 안내원은 없었다.
잠시 달라진 내부에 정신이 뺏긴 사이 미스터마가 비열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입니다.”
왼손을 내미는 미스터 마. 오른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만지작거린다. 처음 봤을 때처럼. 살며시 그의 손을 잡는다. 차가운 냉기가 흐른다. 마치 냉동 창고에서 오래 보관되어 있던 동태를 만지는 느낌이랄까.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사무실로 가시지요.”
복도에 걸어진 그림들도 전부 바뀐 듯하다.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화가의 작품들로 걸어져 있었으니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놓여 있던 전신거울을 바라본다. 그러나 전신거울이 없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아, 전신거울 말씀하시는 건가요. 보기 흉해 내다 버렸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혹시 그때 내가 했던 말이 거슬려서 치워 버린 걸까. 중요한 단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어느덧 미스터 마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사무실 안은 처음 봤을 때 그대로였다. 소파에 앉으러 가면서 벽난로 쪽을 유심히 본다. 없다. 위에 놓여있던 일기장이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 완료 단계를 위해 증서를 가지러 가겠습니다. 홍차 한잔 드시고 계시지요. 향이 좋아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금액은 조금 있다 계좌번호를 알려주시면 오늘 내로 바로 송금해드리겠습니다. 뭐, 아시겠지만 금액은 규정대로 100억입니다. 저희 거래소 역사상 최고금액이지요. 축하드립니다.”
생긋 웃으며 미스터마가 사무실에서 나간다. 그가 나간 것을 재차 확인하고 바로 벽난로 쪽으로 간다. 확실히 없다. 어디에 숨겨놓았을까. 그의 책상으로 가보자. 책상 위에는 마치 시간이 정지 된 듯 처음에 봤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서랍은 안 열어봤었잖아. 뒷일은 생각지 않은 채 서랍을 열어보려 시도한다. 그러나 잠겨있다.
불안해진다.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없어. 급한 마음에 서재에 책들을 뒤적거린다. 먼지들이 흩날린다. 그래도 없다. 발만 동동 굴린다. 발소리가 들린다. 우선 자리에 돌아가자.
미스터 마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내게 금색 종이 한 장을 건네준다.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거래증서』. 밑에는 10,000,000,000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 귀하는 분노거래소에서 해당 분노를 위에 적혀진 금액으로 판매하였습니다. 또한 거래소의 규정을 모두 준수하였고 판매 후 발생될 불이익이나 돌발 상황은 전부 판매자 책임입니다. 이에 동의하였으므로 거래를 완료하였다는 증서를 드립니다. -
“다시 축하드립니다. 여기에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제 사인은 미리 해놓았으니 걱정 마시고요.”
서명을 하려고 하는데 손이 떨린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방문하였는데 이제는 정말로 거래해버리다니. 식은땀이 난다. 사인이 끝났다. 100억이 내 것이다.
“계좌번호 확인 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거래가 끝났군요. 어떠신가요, 소감이.”
“얼떨떨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의 분노가 다른 이에게는 삶의 변화를 제공해 줄 귀중한 재원이 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가셔도 됩니다.”
끝난 건가. 그런데 지금 가면 일기장을 찾지 못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야하는데…
“미스터 마.”
“무슨 일이시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 분노거래소를 라운딩해보고 싶은데요. 안내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목적이 있기에 억지로라도 시간을 끌어야한다.
“알고 싶으신가요. 그저 2층으로 구성된 허름한 건물일 뿐인데.”
“상관없습니다. 잊지 않으려고요. 당신도, 분노거래소도.”
미스터 마가 크게 웃는다. 설마 내 입에서 그런 간지러운 말이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좋습니다. 1층부터 안내해드리죠.”
그를 따라 1층에서 2층까지 안내를 받아 둘러본다. 1층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복도와 걸어진 그림들, 그리고 자물쇠로 잠겨져있는 지하실 문으로 구조되어 있었다.
“지하실문은 왜 잠가 놓은 건가요.”
“별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아서요.”
“지하실도 둘러볼 수는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단호한 그의 말. 무언가 수상쩍다.
“2층에는 제 개인용 사무실과 작은 방 하나가 있습니다. 그 방에서 먹고 자고하죠. 나머지 방들은 예전에 사무실로 쓰여 졌던 곳입니다. 지금은 고객들 자료를 모아놓은 창고로 활용하고 있죠. 참, 저기 저 계단은 3층이 아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옥상도 자주 올라가지 않아 지금은 이렇게 자물쇠로 채워놓았죠.”
“그렇군요.”
끝이다. 분명 사무실에 없다면 저 작은 방 안에 있을지 몰라. 마지막으로 시도해보자.
“그럼 이것으로 라운딩은 끝내겠습니다."
"저기, 저 작은 방도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
당황한 표정의 미스터 마. 그럴 만도 하겠지.
“오늘 좀 이상하군요. 보통 일반 고객들은 이곳을 빨리 나가고 싶어 하던데요. 특별히 손님은 제 VIP고객이라 신경 써 라운딩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사생활까지 엿 보시려 는 건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맞는 말이야. 나도 원치 않다고. 하지만 그 일기장이 내게는 필요해.
“돌아가 주십시오. 평소답지 않군요.”
어쩔 수 없다. 일기장은 추후에 노리던지, 아니면 포기하는 수밖에.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마중은 해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현관문 앞으로 나가던 두 남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K의 모습에 놀란다.>
“J, 미스터마를 잡아요. 어서.”
있는 힘껏 미스터마의 두 팔을 잡아 넘어뜨린다. 순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괴상한 물체가 어디론가 굴러간다. 재빨리 문을 닫아 누가 오는 지 살펴보는 K.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스터마가 다급히 말한다.
“일기장 어디 있어.”
“뭐라고요.”
“당신 아내가 유품으로 남긴 일기장 어딨냐고.” K가 미스터마의 면전을 향해 크게 소리친다.
“사무실로 끌고 가요. 난 좀 뒤져 볼 테니”
<1층을 쥐 잡듯 수색하는 K. J는 미스터 마의 양 팔을 뒤로 묶은 채 2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 올라간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전선으로 그를 의자에 꽁꽁 묶는다. 그리고 사무실 안을 세심히 살펴본다.>
“후회하게 될 거요. 일기장은 이곳에 없으니까.”
“그건 찾아보면 알게 되겠죠.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서 자리를 뜨는 게 좋을 텐데. 그러다 죽을라.”
“누구에게? 내가 죽는다고?”
“규정을 어겼으니까. 당신은 살아서 여기를 못 빠져 나올 거요.”
화가 난 나머지 나는 그의 복부를 주먹으로 수차례 가격했다. 숨이 막혀 그런지 아니면 벌써 이 정도에 나가떨어졌는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그가 기절한 것 같다. 다시 찾아본다. 그러나 보이질 않는다. 젠장, 어디에 있는 거야.
『안 보여. 끝이 없는 사막을 걷는 듯한 이 기분.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의 짜증. 내 안의 분노가 다시 표출되어진다.』
R16: 유인, 또 다른 사실, 분노거래소
“거기는 없었어요?”
K가 벌써 작업을 끝냈나보다.
“네. 사무실을 다 뒤져보았지만 나오질 않는데요. 단지 이 서랍을 빼고는요.”
“…잠겨있네. 열쇠 없죠.”
“네. 어떻게 여시려고…”
“비키세요.”
<K가 품 안에서 구부러진 작은 철사를 꺼낸다. 그리고 열쇠구멍에 집어넣어 이리저리 돌린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철컥하고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옛날 가구들의 열쇠구멍은 철사로 휘저어주면 금방 열리더라고요.”
서랍을 뒤져보았으나 일기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도 살펴봤어요?”
“아뇨. 아직.”
“뒤지세요.”
그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는다. 썩은 나뭇가지를 매만지는 느낌. 살아있는 자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죽은 몸. 한참을 더듬다 뒷주머니에서 작은 황색 열쇠를 찾는다.
“열쇠를 찾았습니다. 아마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데요.”
“들어가 봅시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 안내해주세요.”
사무실을 나와 그의 작은 방 쪽을 향해 달려간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복도 덕분에 금방 도착하였다. 열쇠를 돌려 방으로 들어간 우리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사람이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얼마나 방치된 채로 있었는지 무성하게 자라있는 잡초들 사이로 벌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방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들은 전원은 고사하고 녹이 많이 슬어 도저히 사용할 수 없어 보였다. 조명하나 없이 어두운 방 안. 그리고 간간히 울리는 귀뚜라미소리, 쉬쉬거리는 정체모를 벌레소리.
“제게 라이트가 있으니 같이 찾아보죠.”
들어가기 싫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한다. 비좁으리라 생각했던 방 안은 의외로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충분히 넓고 아늑해 보였다. 하지만 일기장은커녕, 별 다른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젠장맞을. 어디에 있다는 거야.”
K가 성질을 낸다. 저렇게까지 화내는 건 처음 보는데. 그런데 정말 어디에 있는 거야.
“그에게 물어봐야합니다. 패서라도, 아니 반 죽여서라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느긋할지 몰라도 난 아냐. 서둘러 빠져나가야한다고. 모르면 잔 말 말고 닥치고 있어. 알겠어?”
심상치 않은 눈빛. 제 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에게 말 못할 두려움을 느낀 채 다시 사무실로 간다.
“이봐, 이봐. 언제까지 퍼 자고 있을 거야. 일어나.”
“으음. 너희들이군. 일기장은 여기에 없다.”
“알고 있어. 다 뒤져봤거든. 어디에 있어.”
“알려줄 수 없다. 차라리 날 죽여.”
“어차피 죽게 될 거야. 그렇지만 아직은 아냐. 널 죽이는 건 우리 회장님이 하실 거고 나는 일기장만 찾으면 돼.”
“결국은 자신의 욕심 때문 아닌가. 그래서 당신들은 치료가 필요 하다는 거야. 분노를 억제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추스를 줄 아는 지각력이.”
“주둥이 안 닥쳐.”
미스터 마의 뺨을 K가 세차게 갈긴다. 코피가 터져 금방 미스터 마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된다.
“어서, 어서 불어. 시간이…없어.”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K가 심하게 몸을 떤다. 입에는 개 거품을 물며 눈은 뒤집혀져 흰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K가 내게 말한다.
“헉, 헉. 지금 정신이 들었을 때 내 말 잘 기억하세요. 그녀에게 들었겠지만 나도 분노를 거래한 사람이오. 그래서 계약서가 존재하는 한 나는 반 강제적으로 저 놈의 명령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
“그냥 들어! 일종의 의식이야. 저주의식. 당신도 얼마 남지는 않았어. 거래가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시작되거든. 그래도 난 참 운은 좋아. 몇 년이 지나도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까. 하필 지금 나타난 게 문제…지.” 간신히 K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 나간다.
“어떻게…해서든 일기장을 찾아야 해. 그것만이 모두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
“풀어라”
“네”
K가 미스터 마를 묶은 전선을 푼다. 풀려난 미스터 마가 말한다.
“저 놈을 묶어라”
엄청난 힘. 분명 K는 조종당하고 있다. 별 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의자에 묶인다.
“그러게. 날 건들지 말았어야지. 일기장은 바로 내 몸 안에 있지. 하하하하”
<미스터 마가 자신의 심장 부분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말한다.>
“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 일기장을 훔쳐본 건 알고 있었다. 바로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말이지. 감쪽같더군. 그러나 숨긴다고 그게 숨겨지나. 그래서 난 너를 더욱 자극했어. 그때 그 사건 이후로 날 노리는 놈들이 많았거든. 그들을 표면에 드러나게 만들어 제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지. 그게 바로 너였어.”
힘이 빠진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넌 내 기대만큼 부응해주지 못했어. 그래서 잠재된 네 욕망을 이끌어 내기 위해 또 다른 실험체 K를 이용했지.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너랑 접촉한 게 예상외의 결과를 만들 줄이야. 누가 날 노리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잖아.”
설마, 그 더럽고 추잡한 돼지 놈이 날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 원래대로라면 평생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데 떳떳하게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를 K를 통해 접해듣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 계획은 실행하지도 않았을 거야.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철저한 계획을 통해 K를 녀석의 비서로 위장 취업시켰지. 돈은 꽤 많이 들었지만 내가 받을 대가는 투자 한 거 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많으니까. 아깝지는 않아.
K를 통해 간간히 이 분노거래소에 대한 내용들을 너에게 흘리고 다녔다. 그러니 너도 드디어 관심을 갖게 되고 내가 움직이는 장기판이 되어주더군. 너나 K나 아주 훌륭했어. 이로써 나는 복수할 수 있게 된 거야. 임 회장 그 놈을. 그리고 이 세상을. 하하하하.
참. 우리 딸아이는 만나봤나. 가엾은 아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죽이려고 노리는 원수의 수양딸이라니. 조금만 있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그렇지 우리 딸?”
미스터 마가 집무용 책상으로 가더니 액자를 반쯤 돌린다. 그러자 서재가 두 면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 임 회장과 엘리자베스가 함께 묶여있다.
“어때. 어젯밤 K를 시켜 고생한 끝에 이곳으로 초대했지.”
“개자식. 우리를 어쩔 셈이야.”
“천천히 유희를 즐겨야지.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
“내가 내는 『O, X 문제』를 맞출 때마다 한 명씩 밧줄을 풀어주지. 너까지 세 사람이니 총 세 문제겠지. 만약 풀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되는 지 보여줄게.”
<K가 J의 앞에 있는 책상을 수도로 두 동강 내버린다.>
“인간의 잠재되어있는 분노의 힘이란 참 대단해. 그렇기 때문에 ”87억 원“이라는 고가에 팔린 것이고. 뭐 이제는 네가 탑이겠지만.”
뭐라고. 그럼 K가 예전에 최고액수를 기록하였던 분노의 판매자?
“결정했어? 그럼 시작할까. 피와 복수의 게임을”
『더 이상 선택할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없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해. 저 미치광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면.』
R17: 재회, 분노폭발, 분노거래소
“어렵지 않아. 그럼 누구를 먼저 풀어주고 싶어?”
녀석과의 죽음의 퀴즈가 시작되었다. 인간의 목숨을 유희로 밖에 여기지 않는 쓰레기. 고민된다. 누구를 먼저‥
“여자부터”
“좋아. 그럼 첫 번째 문제. 너의 분노의 원인은 학창시절 애들의 괴롭힘과 구타였다.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엑스.”
아니야. 그거는 일부분일 뿐이야. 상담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지 않았는가. 나의 분노는…나의 분노는…도대체 어디서 기인해 오는 거지?
“10초주지. 대답 잘해야 할 거야.”
이렇게 내 인생이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이 변하게 된 원인은 그러한 배경도 어느 정도 한 몫을 했어.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어. 인정하는 거 자체가 내가 패배자라는 느낌을 주니까. 그래서 살아오면서 이를 부정해왔었어. 학창시절 아는 애들과 만나면 부끄럽고 무서운 나머지 피해 다니거나 모른 척 해오기 일쑤였다. 그렇다는 건 내 분노의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저 이유 때문이라는 거잖아. 하지만…인정하게 된다면 내 자신이 보잘것없어져. 나는…나는…
“시간됐다. 말해.”
“……”
“여자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걸 보고 싶다면 대답 안 해도 돼. 안 되겠군. K"
"잠깐“
“오, 이제 말하시게? 멈춰”
<K의 손이 엘리자베스의 목 뒷덜미 가까이 가다 멈춘다. 칼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수도. 조금만 더 늦게 말했더라면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래…맞아.”
“뭐라고?”
“맞다고. 동그라미야."
한 순간의 정적. 이내 들리는 박수소리.
“브라보. 브라보. 아주 잘 맞췄어. 정답이야. 풀어줘”
K가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풀어진다. 밧줄에서 풀어난 엘리자베스가 소리친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뿐이라고요. 그렇게도 모르시겠어요?”
“아가야. 너는 모른다.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그때 이후로 난 죽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너희 아버지는 말이야.”
미스터 마가 양 손으로 턱 부분을 집는다. 그리고 가면을 벗기듯 얼굴 가죽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주름이 깊게 파이고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갸름한 턱에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자의 얼굴로 바뀐다. 짧은 스포츠머리에서 윤기 나는 긴 생머리로, 몸에 부착한 특수 패드와 교정기를 벗어내자 늘씬한 여자의 몸으로 환골탈태한다.
“엄, 엄마? 어떻게…”
“살아있었냐고? 그 잘난 네 아버지 덕분이지.”
분명 여자는 죽었다고 K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내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으니까. 부활이라도 한 걸까.
“확실히 그 사건 때 나는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고 다 죽어가고 있었어. 움직일 힘도 없었고 그냥 어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때였어. 구조대가 올라오기 불과 몇 십분 전, 네 아버지는 내가 있는 곳으로 일기장을 들고 왔지. 그리고 나를 업고 데려 간 곳은 바로 지하에 있는 수술실이었어. 예전 개인병원으로 운영되었을 때 간단한 응급치료를 목적으로 만든 작은 공간이었지. 나는 곧바로 수술대에 눕혀져 응급처치를 받았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실력은 있었나봐
그가 빠른 손놀림으로 수술을 금방 끝냈어.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자마자 경찰과 구조대가 함께 오더군. 다행히 지하실에는 아무도 들여다 볼 생각은 안 했어. 며칠을 꼼짝없이 누워만 지낸지 몰라. 목이 말라 기어서 움직인 게 내 추측으로 일주일 후였던 것 같아. 어둡고 침침한 지하 수술실에서 눕거나 기어 다니는 채로 몇 년을 살았었지.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나중 가서는 배가 너무 고파지는 거야. 그런데 먹을 게 너무나 없어 지네나 바퀴벌레, 쥐 등을 생으로 잡아먹거나 천정에서 맺혀 떨어지는 이슬 등으로 목을 축였어. 목이 말라 근처에 쌓여있던 포도당액을 수도 없이 들이켰을 때도 있었다니까. 그나마 비축해둔 비상식량이 수술실 쪽방에 쌓여있었다는 사실을 늦게 안 게 후회스러운 일이었지. 밖으로 나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사건 이후 분노거래소 주변을 출입금지구역으로 설정해 아무도 찾지도, 오지도 않았다는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천천히 지하실 바닥을 집고 걷게 되었을 때 네 아버지가 다시 나타났어. 굉장히 초췌해진 모습으로 말이야. 우리 둘은 다짐했지. 복수하겠다고. 똑같이 고통을 맛보게 해줄 것이라고. 그래서 시작 된 거야. 『실험체사냥』이.
이미 경찰이 고객명단이나 자료들을 증거로 가져가 사무실 안은 텅텅 비어있었지. 그러나 우리는 이럴 때를 대비해 사본을 만들어 놓거든. 벽난로 뒤쪽 공간의 비밀금고에서 사본들을 찾아 계획을 세웠어. 그리고 하루에 한 명씩. 피의 복수극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에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그들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 아니었거든. 그러나 그들은 달게 벌을 받아야 해. 서로 계약에 묶여 있는 몸이니까. 감히 실험체가 조물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니.
누구 때문에 지들이 새 삶을 얻고 달라졌는데. 어떻게 감정을 조절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이 나 때문이라고. 어찌 보면 일종의 『회수』의 개념이지. 프로젝트는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으니까.
내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이미 추측은 했을 거라 봐. 하지만 가장 원초적이면서 핵심적인 부분은 알지 못 했을 거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억눌렸던 본능을 표출시켜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환락의 세계를 만드는 것. 더 나아가서는 사람의 감정을 지배해 조종하는 것. 그것이 내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더 이상 실험체사냥을 중지하자고 네 아버지가 간절히 애원하더군. 함께 자수하자고. 어딘가에 있을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자고. 나도 그걸 원했어.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어. 왜 그래. 여보.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알고 있어. 그래도 우리는 이 일을 완수해야해. 알잖아. 그만해. 미칠 것 같아. 나 당신을 죽일지 몰라. 그만 말해. 그만. 그만!”
<여 교수가 허공을 보며 소리친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 하고 있는 듯이. 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있는 동작을 취하며 연신 위 아래로 찔러댄다. 소름끼치는 광경. 갑자기 칼질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린다.>
“네 아버지는 죽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손으로. 그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어. 나의 이상에 동조해준 이유가 나를 막기 위해서였다니. 어리석은 사람. 얼마 안 됐어. 계획 진행 중에 죽여 버렸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그이는 산 사람이었으니 그이를 대신할 필요가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난 미스터마가 되어 연기를 해야만 했지. 재밌었어. 철저하게 분장한 것도 있었지만 죄다 나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테니까.
뭐, 이제는 다 필요 없어. 부귀도, 영화도, 그 어떤 것도. 여기서 모두 죽는 거야. 나의 연구는 누군가 계승 할 테지. 자, 그럼 두 번째 퀴즈를 시작해볼까.
<엘리자베스가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서럽게 흐느낀다. 임 회장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교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J는 마음속의 강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전부 놀아 난거야. 그 여자의 간사한 계획에. 나도 실험체들 중 하나였던 거지.』
R18: 광기, 재림, 분노거래소
“두 번째 퀴즈를 시작할까. 너야 아니면 저 늙은이야.”
<교수가 마치 뷔페에서 뭘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표정으로 J에게 묻는다.>
고민된다. 당연히 내가 먼저 살고 보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번은 느낌이 안 좋아.
“뭘 고민하나. 어서 나를 선택하세. 너를 고용한 주인을 구하란 말이다.” 임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격노한다.
"임 회장“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계산한 부분도 있다. 아무도 죽지 않길.
“좋아. 간단한 질문이니 잘 들어. 저기 있는 임 회장은 나와 공범이다.
공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저 년이 하는 말에 속지 말게. 난 잘못이 없어.”
“닥쳐. 더러운 돼지 같은 놈.”
<K가 주먹으로 임 회장의 복부를 여러 차례 가격한다. 임 회장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10초주지. 선택해”
공범이라면 왜 죽이려고 하지? 자기를 배신해서? 그럴 수도 있긴 해. 하지만 왠지 O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어떡하지.
“3‥2‥1‥”
“맞아.”
“어떡하지. 지금은 아닌데.”
<K가 임 회장에게 다가간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몸을 들썩거린다.>
“잠시 멈춰,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저 돼지가 어떻게 나와 공범이 되었는지를.”
“듣기 싫어. 말하지 마.”
“싫은데. 간단해. 저 놈도 쾌락을 느낀 거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말래도. J, 들을 필요 없어. 너도 알잖아. 저 미친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도 발뺌할거야? 응?”
<교수가 품 안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거기서 흘러나오는 임 회장의 목소리. - 좋아. 당신의 프로젝트, 지원해주도록하지. 대신 그때 말했던 내 약속도 반드시 지켜주길 바래. 안 그러면 이딴 건물 없애버리는 건 물론이고 너까지 매장해버릴 테니까. - 녹음을 듣는 임 회장이 사시나무 떨듯 얼어있다.>
“임 회장이 자신의 친구를 죽인 건 알고 있을 테지. 본인은 기억에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가 고의로 죽인 게 맞아. K를 통해 박 씨의 주 이동경로를 파악한 뒤 그에게 알려주었거든. 그리고 사건 이후 회장은 형량을 줄이기 위해 ‘실수였다, 잘 모르겠다.’라고 일관하더군. 그래도 판세가 역전될 것 같지 않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우리를 이용 한 거야. 그래서 내 남편이 대신 감옥으로 간 거고. 저 더럽고 추잡한 돼지는 불구속기소에 집행유예로만 끝났지.
그 얘기를 그이를 통해 듣고는 분개했어.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느낌이었지. 일절의 보상도 없이 우리를 쓰레기 취급했었으니까. 그래서 실험체사냥의 맨 첫 번째 사냥감으로 임 회장을 선택했지. K를 이용해 그를 꾀어내기는 쉬웠어. 하지만 죽이기는 수월치 않았어. 밀고 당기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 된다면 다른 실험체들은 죽이기는커녕 만나지도 못할 듯싶었지. 그래서 그에게 제안을 했어. 내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비와 활동을 보장해주면 당신은 건들지 않겠다고.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더군. 하지만 본인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 남편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목 하에 지원해주기로 약조했지. 사실 그도 하고 싶었던 거야. 인간을 심판하고 사냥하는 행위를. 어쩔 때는 그가 직접 개입해 사냥할 때도 있었으니까. 만약 지원이 없었다면 그 수많은 실험체들을 괴롭히고 추적하기 어려웠을 거야.
재미있는 건 그는 투자한 금액만큼 그대로 뽑아내려고 한다는 점이야. 이 분노거래소를 자신의 비자금 은닉처로 활용한다는 점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87억도, J 당신이 받게 될 그 100억도 전부 저 돼지의 비자금이야. 가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지.
그런데 이제는 K를 이용하여 날 죽이려 한다니. 자신의 모든 치부가 기록되어 있는 저 일기장을 없애고 싶었나보지. 하지만 멍청해. K는 원래 내 장난감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당신이 그 꼴로 있는 거라고. 알겠어? 하하하하하.”
“나까지 잘도 속였군.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어차피 당신은 곧 죽을 거야. 그렇게 신뢰하던 자신의 비서의 손으로 말이야.”
“복수할거야. 난 안 죽어.”
“죽는데도. K, 숨통을 끊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J, 그렇게 날 뛰지 마. 다음은 네 차례니까.”
“그만‥”
<K가 임 회장의 목을 꺾는다. 그의 몸이 옆으로 힘없이 쓰러진다.>
“꺄아아아악……”
“세 번째 퀴즈로 넘어가볼까.”
“당신 도대체 이러는 목적이 뭐야.”
“말했잖아. 이것도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복수야.”
머릿속이 새하얗다. 예전에 거래소 벌어진 그때 그 상황과 똑같이 흘러가는 것 같아. 막아야해. 이런 비극적이고 허무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게 만들 수는 없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완료, 그러나…』
R19: 거래완료, 분노거래소
“마지막 세 번째 퀴즈야. 마음 편하게 풀라고. 하하하하하”
손목시계를 흘끔 보니 벌써 늦은 밤이다. 얼마나 이곳에 묶여 있었던 걸까.
“그런데 너무 아쉬운 걸. 이대로 퀴즈가 끝나버린다는 게 말이야. 그래서 새로이 규칙 하나를 더 만들어봤는데 들어봐. 이번 문제는 오·엑스가 아니야. 한 단어로 표현하기만 하면 돼. 정답이라는 건 없어. 내가 듣고 합당하다면 풀어주는 거고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숨통이 끊어지겠지.”
“뭐가 달라졌다는 거야. 오·엑스에서 단답형으로 바뀐 것뿐이잖아.”
“아니지, 아니야. 좀 더 들어봐. 풀려나는 것에다 돈 까지 건네줄게. 이 카드 안에는 그동안 분노를 거래하면서 받은 수수료가 들어있어. 얼마인지는 말 안 해 줄 거야. 가서 직접 확인해봐. 100억은 아주 우습게 느껴질걸. 어때, 구미가 당겨져?”
아직도 돈에 욕심이 남아있는건가.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는 그 돈이 검은돈으로 밝혀져 쓸 수 없을 테지만 그 전까지 어디에 은폐시켜놓거나 왕창 써버리면 그만 아니겠어. 어마어마한 금액일거야. 놓치고 싶지 않아. 저 멀리 해외로 뜨면 되지 않을까. 그보다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이 우선이겠지.
“돈은 둘째 치고 내 안전은 어떻게 보장해 줄 건데. 아까 다 죽인다고 말했잖아.”
“아아, 그러려고 했는데 내가 깜빡하고 풀어준다고 먼저 말해버렸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털끝하나 건들지 않고 몸 성히 보내주도록 하지.”
“어머니의 말을 믿으면 안 돼요. 분명 우리 둘 다 그녀의 손에 의해 죽을 거라고요.”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퀴즈를 풀기도 전에 죽겠지. 그냥 받아들여. 재밌잖아. 무언가를 더 추가해주면 참여할 마음이 생기겠어?”
“이렇게 하지. 당신도 함께 문제를 푸는 걸로. 그래서 문제를 맞히지 못한 쪽은 말한 약속을 그대로 지키면 돼.”
“이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나를 상대로 감히? 좋아. 아주 재밌겠어.”
“그럼 내가 만약 문제를 맞히게 되면 나와 엘리자베스의 안전 그리고 약속한 금액을 줘.”
“알겠다. 그 반대로 맞추지 못할 경우에는?”
“…”
그래. 맞추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어. 당연히 내가 맞출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그렇지만 항상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이야. 나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엘리자베스까지 엮어들었어. 엘리자베스, 도대체 어떻게 해야…
“J,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저는 괜찮아요. 맞출 거라 믿으니까요.”
“맞추지 못한다면 원하는 대로 처분하던지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좋아. 내가 원하는 건 너희 둘의 죽음이야. 문제를 낼 사람은 누구로 할 건가?”
“엘리자베스로 하지.”
“음…나쁘지 않겠군. 어서 문제를 내.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저보고 뭘 어떻게…”
“뭐든 좋으니 내주세요.”
“그, 그럼 문제를 낼 게요.”
혹시나 그럴 수가 있다. 딸이기에. 차마 정을 버리지 못하고 나에게 불리한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 부탁한 것이기 때문에 생각 못 한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괜히 부탁했나.
“분노란 무엇인지 한 단어로 정의해주세요.”
“하하하하하하. 텔레파시가 통했나. 내가 내려고 했던 문제를 고맙게도.”
망했다. 저 여자가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내놓다니. 역시 모녀지간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이렇게 나는 죽는 건가. 제기랄. 이 더러운 것들.
“먼저 답변할 기회를 주지. 이미 게임은 끝났지만 말이야.”
“시끄러워.”
“K, 슬슬 준비하도록.”
<K가 J의 의자 앞에 서 있다. 양 손날을 세워 J의 양쪽 어께에 놓는다.>
“틀리는 순간 그 자리에서 목이 베일거야. 붉은 피가 샘물처럼 철철 솟아나겠지.”
“저리 치워”
<J가 발을 뻗어 K의 정강이 부분을 세게 찬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K가 두 손바닥을 땅바닥에 집으며 앞으로 살짝 고꾸라진다.>
“저항해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넌 죽은 목숨이니까. 자, 10초야. 대답해”
“시간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호, 10초로 하는 게 좋을 걸. K에게 처단은 10초 후에 하라고 세뇌시켜놓았거든.”
분노. 분노. 분노. 생각하면 생각 할 수 록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너무 많아서 미칠 것 같아. 더구나 엘리자베스가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할 텐데‥
“뭐야? 포기한 건가. 좋아. 그럼 K,‥”
“복수다.”
“뭐?”
“복수라고. 분노는.”
“허, 잘도 지껄이는 군. 그러나 안타까워. 그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생각해놓았거든. 자, 내 대답은 이거야. 바로 『꿈』.”
그럴싸하다. 분노와 꿈, 어찌 보면 연관되지 않는 모호한 관계. 그러나 신선하면서도 무언가 이끌리는 매력이 느껴져. 불안하다. 너무 마음이 불안해.
“사랑하는 내 딸, 이제 결정해주렴. 누구의 말이 옳니.”
“미, 미안해요. J.”
아뿔싸.
“이 세상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가상의 공간. 감정은 사치스러운 것이죠.”
“그래. 내가 이겼어. 하하하하”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답은…”
“어서 말해. 꿈이라고.”
“복수예요.”
“말, 말도 안 돼. 수 백 번 고민하고 내게 주입시켰던 답이야. 어째서 답을 바꾸는 거야 멍청아.”
“난 어머니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나와 내 아버지의 인생을 망친 것과 다른 사람의 꿈까지 파괴해버린 너를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리며 소리친다.
“이것들이.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이건 내가 이긴 게임이야. 내가 처음부터 이기도록 조작된 게임이란 말이야. 어긋나면 안 돼. 절대로 어긋나면 안 돼. 뭐해 K. 당장 저 둘을 없애버려.”
“J!"
"엘리자베스, 움직일 수 있으면 어서 도망가. 기어서라도. 빨리.”
“사이좋게 저승으로 가라.…헉”
<K가 J에게 가다말고 교수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교수의 목덜미를, 다른 한 손으로는 심장에 댄다. 이윽고 심장에 댄 손을 앞으로 쭉 민다. 터져 나오는 피의 분수. 몸에서 통과된 손에는 피에 젖은 일기장이 꽉 움켜져 있다.>
“카악, 헉, 헉, 어떻게, 어, 어떻게…”
“녀석의 발차기 때문에. 환각이 깨졌거든.”
“너, 너…”
“애초부터 나나 너나 살아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어.>
“다, 당신. 서, 설마.”
<잠시였지만 K의 얼굴이 교수의 눈에 미스터 마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의 팔이 축 늘어진다. 그녀의 숨통이 끊어진 것이다.>
“이봐 너희들.”
“정신이 돌아 온 거야?”
“어서 나가. 빨리…”
“하지만 K 당신은 어쩌려고.”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
“안 돼.”
“몇 분후면 내가 설치한 폭약이 터질 거야. 너한테 얘기했던 것처럼 이곳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그러지 마. 나는…”
“잔말 말고 어서 꺼지란 말이야. 임 회장을 깨워. 기절한 것뿐이니까.”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죽었으면 좋겠지만 내 무의식에서 무언가가 살인충동을 막았어. 실질적으로 정신이 회복되었을 때가 바로 그때였지. 아직도 정강이가 얼얼한데?”
“난, 난 어떡해야”
“내 몫까지 살아. 이 일을 세상에 알릴 지, 아니면 조용히 덮을 지는 너가 선택할 부분이야. J, 날 믿어줘서 고마워. 빨리 도망쳐.”
“미안해. 정말 미안해.”
<J가 엘리자베스를 묶은 끈을 푼다. 그리고 임 회장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정신이 들었는지 작게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J가 등에 업는다. 엘리자베스는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간다. 고요한 적막.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폭발에 휩쓸려 죽게 될 것이다. 끔찍한 상상을 뒤로 한 채 다행히 거래소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K…"
<거래소 2층 미스터 마의 개인 집무실 창문에 피투성이의 그가 보인다. 생긋 웃는 그의 표정이 왠지 슬퍼 보인다. 이윽고 큰 화염과 함께 분노거래소가 불탄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화염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거래소 전체를 불태워버린다. 활활. 뜨겁고 강렬한 그 불빛은 몇 분간 지속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이게 뭐야 도대체.”
“J…"
“엘리자베스, 이 모든 게 다 꿈일까. 꿈이라면 정말 좋겠어. 난 도대체 뭘 한 것일까.”
<언덕 아래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러 퍼진다. 분노거래소는 여전히 불타고 있다. 밤하늘은 너무나도 청명하고 공기는 상쾌하다. 그의 발밑에 떨어진 『거래완료』증명서. J의 몸에서 짙은 검은색 오오라가 보인다.>